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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신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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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산책

인문학이란 신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나는 나의 신화를 알고 있다. 신화를 안다는 것, 그건 신화를 산다는 것이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신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신들의 이야기라고 지레 멀리로 떠밀어두고 모른 체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견딘다.


그 완벽함에 전혀 못 미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라며.....그런가? 신이 따로 있다면 어디에? 우리는 읽었다 신의 소재를 밝히는 대서사시 호머의 일리아스를, 알고 싶지 않은가?


 나로서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신화를 알고 나서 신화를 살게 되었을 때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흥미진진하고 신났다.


우선 그건 삶의 한층 깊은 곳에서 놀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깊은 곳은 어디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면서, 내가 태어나기 위하여 거쳐 왔던 수억 년도 더 너머의, 원형질의 우주 저편에 있는 존재의 근원인 곳, 또한 수억 년도 더 미래 저편으로 살아갈 그런 곳이다. 그건,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을 지칭하며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신화는 그래서 신화다. 신들의 이야기 속에 무슨 인간의 상상 속으로 가져올 그런 한계가 있다할 것인가. 그러나 진정 그런가? 인간의 한계와 신화는 다른가?


호머는 이야기한다. 신화와 인간의 삶에 대하여. 그 완벽한 일체성을 일리아스에 구현해놓았다.

 

나는 호머를 읽으며 적어도 그 일체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신과 인간은 하나다’라는 놀라운 진정성!
신화는 인간의 경험 속에서 창조된 이야기일 뿐이다.


인간의 생각(포세이돈)에서 인간의 입(헥토르)으로, 인간의 삶(네스토르)에서 인간의 상상력(아폴론)으로, 인간의 사랑(헬레네)에서 인간의 변화무쌍(아프로디테)으로, 인간의 질투(헤라)에서 인간의 온갖 죄악(아담과 이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에로스)에서 인간의 무력함(하데스)으로, 인간의 한계(아킬레우스)에서 그것을 뛰어넘은 인간의 무한자유의 힘(예수, 부처)으로.....신화는 끝없이 진화해왔다.


생명체의 진화가 다름 아닌 무한히 변형된 생명들의 또다른 모습인 것처럼 신화 역시 삶의 뿌리를 딛고 변화해온 인간의 이야기들이다.


그 주인공들이 신의 모습을 빌려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신화의 면면은 ‘인간의 삶+알파’다.

 

 그 알파가 바로 신들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위대성은 신화를 바탕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곳곳에서 생성되어 창조, 부활하고 있다.


일리아스를 읽다보면, 참 웃기는 게 신이다.


무슨 신이 그렇게 오락가락 변덕스럽고, 무슨 신이 그렇게 속도 좁고, 무슨 신이 그렇게 질탕 바람쟁이이며 권력욕에, 애욕에 빠져 파도를 일으키고, 인간의 순수한 목숨을 함부로 넘보더란 말인가.


 인간의 세속적이며 가장 인간적인 유형 속에서 날마다 발견되는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의 신들과 한바탕 어울려 꽹과리춤을 추는 인간들. 그러나 통속적인 춤만은 아닌, 역설적이고 통쾌한 춤들로 난만한 전장!


 진지하고 이지적이고 영웅적인 인간의 뒷모습 속에 가장 질투심 많은 신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타나 삶의 웅덩이를 파며 그 흙탕물 속에 모두를 빠트린다. 그러면서 그들의 고통과 용기와 사랑과 절망을 소조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지나왔을 때 그 신들의 장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 타고난 재주? 타고난 의지? 타고난 운명?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라면, 또한 모든 신은 무용지물이다! 신(신화)의 의미를 좀 더 논리적으로 밝힌다면 다만 ‘인간인 주인공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일 뿐. 인간이 없는 곳에 신은 존재할 수 있는가?


신이 창조한 인간과 죄와 선악과.... 그에 대한 답변이 가능한가? 어찌 그러한 변증법이 통용되어 왔단 말인가? 그것에 관련된 대답이 나의 신화가 탄생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화다. 나라는 인간의 삶의 어깨 위에서 신들은 ‘+알파’로서 존재한다. 나는 죽음을 보았다.


죽음 가까이에서 그 지점에서 만날법한 신들의 아무런 눈빛도 음성도 작은 기미조차도 없음을 확인했다.


죽음과 맞닿은 시간에도 신은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나라는 인간은 다만 삶에 대한 가장 확연한 어떤 경험 속의 한 생명임을 인식했을 뿐이다.


그 경험은 나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관념이란 것을 확인하게 해 준 내 생의 최대의 축복이었다.


삶은 삶으로 시작해서 삶으로 끝날 뿐인 지고지순한 생명의 꽃이다.


죽음은 내게 없다. 삶의 과정으로서 한 생명체가 영원한 자연 속으로 진입하는 통과의례일 뿐.


그러하므로 어찌 지금의 삶이 신화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랴. 내게 창조주로서 기능한 부모와 자연과 함께 우주의 질서가 영원히 되풀이되고 있으며, 그것을 믿는다. 앞으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를 통하여 내 아이들이 그 질서를 지속시켜 줄 것이며, 또한 나의 개체는 한 개체일 뿐 아니라, 모든 영속한 생명의 씨앗이다.


그 안에 깃든 신성이 바로 나라는 인간이다. 저 나무와 꽃과 바다와 산맥과 지렁이와 개와 다람쥐.....엊그제 향일암에서 본 동박새의 지저귐과 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지금은 돌의 형상으로 남아있는 거북이....내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저 먼 바다에서 신비로운 숨을 내쉬고 있을 고래.....그리고 바윗덩이의 자취로 기념된 원효대사가 참선했다는 그 터!


그 터의 신화! 나라는 인간은 그 터에 앉았던 원효의 영혼과 무엇이 다르며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고 그는 나다!


 결론은, 신화란 바로 현재의 내 생각과 상상 속의 창조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신화를 창조할 것인가?

 

그건 바로 내 자유일 뿐! 누가 어떻게 나에게 나의 신화를 창조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의 신화다, 그러므로 나의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 내 삶이 지속되는 한. 그러나 그건 한계의 의미가 아닌 영원 속의 삶의 지속이다. 나의 즐거움은 그 선상에서 춤추는 일상이다.


누가 그 춤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어제도 내일도 나는 신화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


무슨 신화라고 특별히 의미부여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신화다. 태양과 바람과 불과 물과 금강석 그 존재들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 숨 쉬고 있는 나의 신화.


 모든 의미가 가능한 텅 빈 충만의 신화적 우주가 나의 시간이요 공간이다.


노자가 공자가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니체가 보여준 다만 살아있음의 경험이 신화라는 말이 가슴을 꽉 채운다.


김남주가 지금 죽었는가? 백범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는가? 베토벤이 없는 곳이 어디인가?


그들(나)에게 사라짐은 없다. 더구나 허무는 없다. 불행도 없다. 좌절도 없다. 그들의 삶이 시간만인가? 공간만인가?


그들이 태어난 그때(****년 *월 *일)가 그들의 삶으로서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으로서 완전히 설명되는 그들의 삶(역사, 신화)인가? 아니다.


그들은 죽음(형식적인) 이후로도 수천 년, 수백 년,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나 사이에 다만 ‘영원히 지금’인 ‘지혜’와 ‘도’와 ‘인’과 위버멘쉬’와 ‘조국은 하나다’와 ‘민족의 통일’과 ‘음과 악기와 인간이 합일된 선율’이 있을 뿐.


우리가 맘먹기 나름인 이 시점에ㅡ,우리가 그 ‘선택의 선물’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엔가 있단 말인가?


진정 지혜가 아닌, 도가 아닌, 인이 아닌, 위버멘쉬가 아닌, 통일로서의 하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다른 말이 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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