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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호모 데우스’의 행복을 설계하는 인문학

기사입력 2018.05.1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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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니 어떤 삶을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인류의 과제 중 가장 오랜, 본능적인, 인지적인, 철학적인 물음이 바로 행복에의 물음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사피엔스의 불만은 그것이었다. 단 100년 정도 살다 가야 한다는, 사라짐의 그 허무 속으로) 더구나 세상은 그 유한성 안에서 결코 한 가치가 한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법이 없으므로. 다양성이란 이럴 때 좋은 것일까?


    일관성이 그 다양성 속에서 생명의 본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흔들리면서도 크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이란 또다른 말로 복합성, 복잡성, 혼돈, 혼란, 갈등....등 삶의 그물망을 뒤흔드는 가치와도 다르지 않아서 삶은, 햇살의 변덕스러움만큼 흐렸다, 비오다, 천둥치다, 번개치다, 하는 것임을.....


    세계는 어느 덧 그 복합성을 빅데이터화 하고, 거대경제화 했으며, 제국주의화, 생명공학화, 인공지능화해 왔다.

     

    이제 농업혁명, 과학혁명, 3차 산업혁명의 위대한(?) 역사를 일구어낸 사피엔스적인 그런 인간의 냄새는 더 이상 ‘현대인의 모던한 특질’이 아니다. 무엇인가 우리는 더 모르는 어떤 세상을 상상하고 적응하며 대비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어떻게 할 것인가?


    “인지혁명이란 호모 사피엔스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이며, 사회적 관계에 대해 더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이며, 부족정신, 국가, 유한회사, 인권 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이 일어난 변화를 말한다.


     사피엔스는 인지혁명을 통해 대단히 많은 숫자의 낯선 사람들끼리도 협력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사회적 형태의 급속한 혁신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사피엔스는 인지혁명을 통해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주된 요소가 된 행동 패턴의 다양성을 거느리게 되었고, 일단 등장한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했으며 그 멈출 수 없는 변화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지혁명이란 역사가 생물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사피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경로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가 생물학적 속박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면서 선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운동장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인류가 이미 그 해결점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만큼 자부하고 있는‘역사적 과제’가 있다면, ‘기아, 질병, 전쟁’이라고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의 저자)는 진단한다.


     그건 생물학적 인간의 과제이기도 했고, 화학적 인간의 행복에 관여하는 세로토닌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으며, 거대 정치적인 세계 속의 국가와 지구적 인류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현재적 시점에서 그 모든 문제가 일시에 깨끗하게 해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해결할 의지가 사실상 크지 않다. 인간은 너무도 권력지향적이며 에피쿠로스적이다. 또한 인간은 집단적 도덕윤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완전인격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사회적 불평등과 국가적 폭력과 비생명적 정치윤리가 더 많은 생명들을 소외시키고 모른 체하고 철창에 가두고 있다.


     법집행도 아직은 더욱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상태로 시행되고 있다. 그에 더하여 인간 자신을 신의 범주에 넣어 그 생명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자 한다.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비(非)유기체 합성”과 같은 인간최첨단과학화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생명공학자들은 오래된 사피엔스의 몸을 가져다 유전암호를 고치고, 뇌 회로를 바꾸고, 생화학 물질의 균형을 바꾸는 것은 물론 새로운 팔다리까지 자라게 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신을 창조할 것이고, 그렇게 탄생한 초인류는 우리가 호모 에렉투스와 다른 만큼이나 지금의 사피엔스와 다를 것이다.”라고 유발 하라리는 진단하고 있다. ‘호모 데우스’의 의미는 이렇게 정의 내려진다. 

     

    특히 그 거대한 미지의 세계로 돌진하고 있는 세계를 느끼는 사피엔스의 두려움은 딴 데 있지 않다.


    과학의 중심에 서있는 전문가들조차도 그 세계의 흐름에 이르러서는 ‘브레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학의 모든 최신 발견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세계경제가 10년 뒤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도, 우리가 이토록 급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시스템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멈출 사람도 없다.


     둘째, 만일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는다면, 경제가 무너지고 그와 함께 사회도 무너질 것이다.....


    그런데,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필요한 거라면 우리는 왜 행복과 불멸로 만족하지 않을까? 적어도 초인적 힘을 추구하는 무시무시한 시도를 왜 내려놓지 못하는가?


    업그레이드란 그런 것이다. 획기적인 기술이 일단 생기면 그 기술을 그때까지의 목적에만 한정하고 업그레이드 용도를 전면 금지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원인이라면 이런 일들은 21세기에 개인들이 실제로 한 일이 아니라, 인류가 집단적으로 한 일이라는 것이다. 추구하고, 획득했다! 우리가 개발한 날씨의 시스템은 우리의 예측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발전 과정은 우리의 예측에 반응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예측은 어려워진다.


    지식이 축적될수록 그렇다. 미래는 고사하고 현재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이해하지 못 한다.


    이것이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행동을 바꾸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 폐기된다.


    미지의 세계가 미지일 뿐이라는 예측이 가능한 점이다. 장대한 사회혁명! 그것은 우리의 일상의 미시적 영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 미지 속의 불안감에 대하여, 명쾌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오래된 미래를 단 한 마디로 예측해본다. 감히. 꽃!이라고.

     

        


      한 통도 아니다

     

         세 통도 아니다

     

         너에게로 가고 싶다

     

         네 품에 파고들고 싶다

     

         네 향기에 코 박고 잠들고 싶다

     

         천년만년 무릉도원에서처럼 너랑 죽고 싶다

     

         맙소사!

     

         난 아직 새벽 꽃입술 조차 열지 못 했는데

     

         향기는 언감생심!

     

         언제....난 부추꽃 피울 수 있을까

     

         하화도 부추꽃처럼 향기로울 수 있을까

     

         그대 청띠제비나비 푸르른 편지 갈기갈기 찢어 촛불 태우며

     

         함께 날아갈 수 있을까

     

         허허(虛虛) 방울 가득한 저 파도 너울 속으로

               

      --졸시  <청띠제비나비 편지>

     

      오늘 여행을 계획한다. 어딘가로 가고자 하면 갈 수 있다.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 어떤 즐길 거리가 있는지 몇 시간이면 모든 문제는 씻은 듯이 해결된다.


    맘 먹은 대로인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기획과 실현들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호모 데우스 과정을 더욱 확실하게 체험하게 하는 바로미터다.


    삶이란 자유로운 것이다! 그 자유의 함정이 앞으로의 세계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면 그 ‘자유’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무소불위한 문명과 사피엔스적 가치관들이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삶을 위하여 협조하지 않는 시대,

     

     한 인간의 고뇌가 그 한 존재의 문제로 생성변화하고 결론에 이르지 못 한다면, 어떻게 행복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가고 싶은 곳은 있되, 그곳에 가면 전혀 예상 못 했던 삶의 형태가 기다리고 있고, 그 형태대로 우리의 삶의 패턴을 교체해야 한다면....


    훌륭하다고 판단했던 가치들이, 행복했다고 느꼈던 우리 모두의 지향점들이 하루아침에 떠나온 지구별의 과거가 되어버렸을 때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미래를 두팔 벌려 껴안을 그런 감성이 꽃과 함께 피어날 수 있을까?


     꽃!이 화두다. 이야기의 시작은 다시 꽃으로부터일 것 같다. 꽃이 살 수 있는 곳, 꽃을 심을 수 있는 땅, 그 땅이 우리에게 남아있는가?


    꽃이 좋아하는 빗방울, 그 빗방울이 고인 물을 먹을 수 있는가? 아니라면,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본질의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꽃을 찾아서 아니, 꽃이라는 생명의 텃밭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꽃에 대하여 우리는 알고 있다.


    알 수 있다. 그것은 그 생명체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해 온 바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꽃의 날을 정하는 것은 어떨까? 바로 ‘날마다’가 되겠지만. 그 땅으로 날아와 평화로이 살고 싶은 ‘청띠제비나비로부터 온 편지’가 그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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