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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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화합을 위한 시 /이민숙.우리는 만났다 한 잔의 실재를 놓고 우리의 그동안은 왜 허구처럼 느껴지는 걸까한 번도 만나지 못 했던 건 아니지만그가 택한 시간들이내 삶의 중심, 껍질을 빠져나갔던 것처럼, 1910년 그 날 3월 1일!그로부터 864,000시간이 흘렀다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는가우리는 그 부끄러운 잔재 속에서 행복했고 눈물겨웠고빈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밥을 먹고어디에서 어둠을 피했으며빛날 수 없는 양심의 결을 내팽개친 시간들 속에서얼마나 열렬히 거짓을 외쳤는가! 우리는 자유와 부조리를 양어깨에 멘 짝꿍이었다달리기를 하며 하룻날 경계에 섰을 때박수도 쳐주고눈물도 흘려주고잃어버린 한 짝의 신발도 찾아주는 사이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그런 사이 왠지 그런 햇빛 아래에 서로 서 있을 줄,어두운 밤희뿌연 새벽황홀한 윤슬 때문에가슴이 눈부실 때서로의 눈빛이 어떻게 일렁이는지몰랐을까 알고 싶었을까 오늘, 우리가두하나 들쭉술*을 마시기 위하여 서로에게한 잔씩을 따라주는데그 한 잔 안에 뽀얗게 안개 끼어 바람 불던한라산 허리에 피어나는 설연화(雪蓮花)가 흰눈 속에서 방긋 웃는다 864,000 시간이란 그 한 잔의 순간일까그 한 잔의 영원일까어제, 내일, 오늘일까 역사일까 그냥 흐름일까 시간일 뿐 그냥 흐르고 있을 뿐,이 아님을 오늘의 저 하늘은 조곤조곤 속삭이고 있다 *북한술 이름 --졸시, <864,000 시간 후> 전문 /[3.1운동 100주년 기념시집] 수록 인문학은 나아감이다. 인문학은 어둠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인문학은 결핍의 씨앗을 발아시켜 꽃으로 나아가게 하는 행위이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듯이, 품었던 알을 깨어나게 하듯이 한 생명의 탄생과 깨우침을 예비한 시간들이다. 그렇게 품었을 때, 생명은 하룻날 노란 부리를 달고 어떻게 거침없이 날아갈 것인지 무한 창공을 바라본다. 인문학은 그런 본능적이며 존재론적인 시간을 포함한다. 아기가 엄마 젖을 빨 때, 그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지만, 인문학적인 존재로서의 나아감을 통해 그 본능은 인식의 단계를 거친다. 나아감이 없다면 인문학을 했다고 할 수 없다. 삶의 한가운데서 불현듯 왜 이렇게 권태로운가? 하고 묻게 되었을 때, 그 시점이 인문학적인 출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감은 창조다. 생명의 존재 이유를 말할 때, 창조성을 빼놓을 수 있을까? 창조적인 삶은 태양의 빛을 닮았다. 날마다 떠오르면서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우주의 흐름을 관장하는 에너지의 핵을 받아 마시는 행위가 생명 생성소멸의 근원이라 할 때, 인문학적 에너지를 삶의 근원이라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인문학은 언어라는 척추를 통해 발현된다. 인간이 태어나서 동물적 일상을 넘어서는 과제 중 중요한 것은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다. 언어를 벗어난 인간을 상상하기 어렵듯이 언어의 다리를 건너지 않은 인문학을 설명할 수 없다. 인문학적 나아감은 그래서 언어적 나아감이다. 가나다라마바사………ABCDEFG………天地玄黃………모든 나아감은 언어와 함께다. 어떻게 가든 국경을 넘어서며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 바로 언어다. ‘다른 어떤 세계’에는 ‘다른 어떤 언어’가 있다. 딴 세상을 안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정복할 때 가능하다. 멀리 갈 때도 그렇지만, 바로 옆에 사는 한 인간을 안다는 것도 그와의 대화를 통하지 않고는 전체적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그의 마음을 어떻게 눈빛만으로 다 알 수 있다는 건가. 현대인이 전 지구적 삶을 구사할 수 있는 것도 문명의 이기인 언어를 익히고 언어적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원시적 삶을 통해 구현할 인간적 삶도 아름답지만, 짧으나마 역사를 축적해온 인문학적인 삶은 언어의, 언어를 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의 영양소를 취하러 들락거리는 도서관은 언어의 집이다. ‘존재가 언어의 집’이듯이. 그러나 또한 그것만으로 그만인가? 시 한 편, 책 한 권 읽으면 인문학적 인간인가? 단순 지식의 취득, 그것만으로 인문학적인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김수영- 인문학이란 바로 오늘 하루를 온몸으로 살 때, 오늘 하루의 삶 전체를 쓰고, 읽고, 공감하는 것, 그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그것이야말로 한 발짝 ‘나아가는 인문학’의 행위임을. 우리의 시를 역사적 오류와 모순을 위해 쓸 수 있다면 그것이 나아감의 도덕적 행위로 가까이 갔다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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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행위를 위한 역사적 지향점이다.인문학은 행위를 위한 언어적 보상이며 선물이다. 현자들의 말은, 말의 말이 아니다. 그 말의 씨앗은 바로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의 활동을 증가시키거나 직접 활기를 불어놓지도 않으면서 가르치려고만 드는 모든 것을 나는 싫어한다.”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니체는 말한다. 역사의 가치와 무가치에 관한 고찰이 필요한 이유는 ‘활기를 주지 않는 교훈, 활동을 잠재우는 지식, 또 값나가는 인식의 과잉과 사치인 역사’가 우리에게 넘치는 것(삶의 껍데기)으로서 어떻게 잘못 기능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인문학과 그 행위와의 만남은 그러므로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가. 그러므로 결국 역사와 비역사적인 삶이 우리에게 올 때 어떤 것이 더 권태나 왜곡이 없이 올 것인가. 인간에게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란 더 원초적인 능력임을 알아채는 것은 중요하다. 비역사적인 인간은 올바르고 건강하고 위대한 것인데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는 비역사적인 그 무엇이다. 비역사적인 것은 무언가를 감싸는 분위기와 ‘그 안에서 삶은 스스로 생성되며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인간이 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문제시되는 역사적 측면은 무엇인가? 첫째, 역사의 과잉이다. 역사의 과잉은 살아있는 것에 해를 끼친다. 역사는 행동하고 추구하는 자로서,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로써, 고통 받고 해방을 요구하는 자로서 살아있는 것에 속한다. 그러나 필요에 의한 역사, 권력의 요구에 의한 역사 기록은 과잉된 역사일 수 있으므로 문제를 품고 있다. 두 번째, 역사란 즉 진정한 역사란 충성과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난 자라난 곳을 뒤돌아보는,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에 속한다. 그는 예로부터 있어올 것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돌보면서 자신이 생겨난 조건을 자기 뒤에 올 이들을 위해 보존하려 한다. 그런 식으로 그는 삶에 봉사한다. 그러나 그런 기념비적 역사가 삶에 봉사하고(진실을 외면하는 측면에서) 삶의 충동의 지배를 받는 한, 과거는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즉 나무는 자기 뿌리를 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느낀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나 한 도시 공동체 또는 전체 민족의 골동품적 감각은 항상 제한된 시야를 가진다. 대다수의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 하고, 그가 보는 작은 부분을 너무 가까이 너무 고립시켜 본다. 여기엔 위험이 항상 가까이 있다. 시야에 들어온 오래된 과거의 것은 모두 동등하게 소중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 오래된 것을 존경심으로 대하지 않는 모든 것, 즉 생성 중에 있는 새로운 것은 거부당하고 적대시된다는 것. 그러므로 역사적 고찰이 새로운 가치의 척도가 된다고 볼 수 없는데 무엇보다도 새롭게 적시할 가치의 제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지닌 지식이란 이동하는 백과사전에 비교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 낯선 시대들, 관습들, 예술들, 철학들, 종교들, 인식들로 우리 자신을 채우고 넘쳐나게 함으로써 우리는 무언가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그러나 백과사전의 가치는 책의 외면에 있는 것, 책의 장정이나 표지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것, 즉 내용에 있다. 그렇게 현대 교양 전체는 근본적으로 내면적이다. 그러나 그 백과사전을 간단히 받아들임으로써 실제 사물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생긴다. 그 결과 ‘약한 인격’이 생겨난다. 역사란! 또한 문화란, 높은 통일성 즉 내용과 형식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한 민족의 문화를 추구하고 장려하려는 사람은 이 높은 통일성을 추구하고 장려하며 진정한 교양을 위해 현대적 교양을 파괴하는 데 동참한다. 또는 그 역사로 인해 손상된 한 민족의 건강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 그 민족의 본능을 또 그로써 그들의 진실성을 어떻게 다시 발견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참된 역사란 백과사전식의 기록을 거부하는 ‘창조적 발견으로서의 진실된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주희는 한 인간의 인격적 자세를 ‘신독(愼獨)’을 통해 강조하며 피력했다.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생각하고 한결같이 행동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 그건 임금의 왕위와 국가를 다스리는 철학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수신의 법칙이 아닐까 싶다. 戒愼乎 其所不睹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 恐懼乎 其所不聞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한다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사회, 공동체의 구성을 이루는 ‘역사’에 동참할 때 스스로의 인격을 책임질 수 있으려면 그 방식은 ‘신독(愼獨)’에 있음을 배운다. 니체의 역사관이 ‘책임’과 ‘새로움’을 향해 있으면서 구구절절 권력지향, 기록된 과거에 머무르는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면, 중용에서는 삶의, 역사의, 군자의 인격도야에서도 첫 단추를 어떻게 꿰어야 하는지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다. 역사를 산다는 것, 단순명료하게 스스로의 인격을 구성하고 난 후에 좀 더 깊은 강물의 흐름을 직시하는 일일 것이다. 작금의 사태를 보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과 지도자들의 인격적 모순 속에서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이지만, 한 편으로는 더 새롭고 탄탄한 사회로서의 도약을 고민하게 하는 역사적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라는 인간 개인적인 역사에 대해서도 더욱 엄밀한 각성을 요구하게 된다. 신독의 시간(보이지 않음, 들리지 않음 속에서의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산다는 건, 사랑맞이 하는 일이다 산다는 건, 날마다 발가락 사이에 코를 대고 서로의 몸을 맡는 일이다 산다는 건, 매화 한 송이의 봄을 참회하는 일이다 그 엄혹의 운명으로 바이칼 창천을 꿈꾸는 일이다 산다는 건, 그러다가 흰뺨검둥오리 한 쌍 되어 퐁당퐁당 자맥질하는 일이다 물로 물로 찰방거리다 불처럼 노을을 태울 때까지 불로 불로 타오르다 진창의 순간 피울 때까지 산다는 건 하지만, 결코 매화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머리카락조차 떨리는 벼랑 끝에서 아프고도 서러워한 적 없다면 운명 같은 패배의 시간 어루만져 통증 위로한 적 없다면 --졸시, <매화, 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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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를 향하여, 인문학은 존재를 비추는 거울.한 존재의 탄생은 그야말로 고독을 위한 첫 발자국이다. 아무도 그를 살아가게 돕지 못 한다. 그러나 정반대로 입고, 먹고, 싸고, 자고, 생각하고자 할 때 존재는 혼자 또한 그 일을 할 수 없다. 무엇인가. 혼자 아닌 삶이 진정한 삶인가, 혼자인 삶이 더 진정한 삶인가. 삶의 정체를 위하여 일생을 묻고 대답하는 게 인문학이다. 니체는 그 삶의 전체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비극’이라는 예술이 탄생했다고 정의했다. 그는 명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신화인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의 말을 빌어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왕의 다그침에 그는 말한다. “가련한 하루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왜 하필이면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복될 일을 나에게 말하라고 강요하는가? 최상의 것은 그대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네. 태어나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은 바로 죽는 것이네.” 그건 그리스인들이 깨우친 실존의 ‘공포와 경악’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올림포스 신들이라는 꿈의 산물을 세워야 했다. 자연의 거대한 힘에 대한 엄청난 불신, 모든 인식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하는 저 운명의 여신 모이라, 인간의 위대한 친구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하는 저 독수리, 현명한 오이디푸스의 저 무서운 운명...... 모든 생명 존재의 필연적 고통을 향하여 도전적 반항의 삶을 택한 인간들은 신과 대적하며 그 공포를 미의 질서로 바꾸어야 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란 다시 무엇인가. 인간과 자연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도구이다. 자연은 참혹하며 변화무쌍하여 인간의 그 어떤 끈질긴 문제의식이 아니면 함께 할 수 없고, 도달하기 어려운 거대함이다. 그것의 민낯에 다가가는 문제의식이 바로 인문학이며 예술이다. 또한 ‘그리스적 의지’라고 니체는 진단한다. “그리스의 의지는 이 아름다움의 거울을 가지고 예술가적 재능과 상관관계에 있는 고통을 받는 재능, 고통의 지혜에 이르는 재능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 승리의 기념비로서 호메로스, 즉 소박한 예술가가 우리 앞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생애는 그 고통스런 실존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꿈꾸는 길’에 다름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 현대의 대한민국, 우리 민족의 실존적 고뇌는 바로 어쩔 수 없이 닥쳐왔고 살고있는 핏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 누가 아니라도 핏줄의 생이별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서글픈 모순적 상황이다. 한 개인의 바람이 아닌 역사적 오류의 시대가 닥친 그 어느 날, 그들은 헤어졌고 만날 수 없었고 비통한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제도도 법도 해결책도 없이 어언 한 평생을 넘기고 있는 것이다. 그 기막힌 동족산장의 피맺힌 역사를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지금도 지속적으로 가슴을 할퀴는 저 반민족의 논리를 우리 아닌 세계 강대국의 이권다툼으로 전락해버린 사태를. 가야 한다. 만나야 한다. 풀어야 한다. 그렇게 할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평화와 사랑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월의 하노이에는 서기가 서리고, 세계 역사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낼 것이다. 우리 작가들은 그에 앞서 2월 세계작가대회를 하노이에서 열 계획이다. 대한민국의 소박한 시인인 나는 작은 소망으로 그 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아니 더 큰 열망으로 치열한 전쟁을 치뤘던 그 땅에 발을 딛고 어떤 공기가 흐르고 있는지 몸소 체험할 요량으로 다녀오려 한다. 벌써 가슴이 뜨겁다. 세차게 요동친다. 이곳에서 쓴 시는 이렇게 단순 소박하지만, 그곳의 역사를 온몸으로 부딪치고 나면 더 진정성 있는 시 한 구절 쓸 수 있으리라. 미친 듯 받아쓰게 흘러나오는 말의 춤이 오늘을 물들일 때 하늘엔 한 방울의 달빛이 동그랗게 달무리진다 흡월! 언젠가는 달인 그대를 진심 좋아라고 쫓아다녔을까 한 번 사랑하면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주춧돌 앉히던 시절은 노란 수선화의 청춘이었다 치자, 조계산 배바위는 바다가 밀려왔던 흔적이라는데, 어쩌랴 내 몸도 바람 흙 구름 그리고 참나무 잉걸불로 반죽해야만 막사발 하나라도 남길 수? 화두는 백척간두진일보나 무나 죽음 따위가 아니라 조기굴비냐 베트남 쌀국수냐 뭐 그런 게 더 치열하다는 둥! 하노이에 가서 쓸 수 있는 시에 대하여, 밤바다를 베고 누워 꿈꾸는 여수의 윤슬이, --졸시 ‘베트남 쌀국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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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누군가가 탄생시킨 지고지순한 글들의 집합체다.남편을 낳아준 시어머님 제삿날, 그녀의 손주가 절을 한다 그 절이 말을 낳는다우리가 세상에 와 배를 먹을 수 있는 건할머니가 배 아파서 낳아준 오늘 때문이다그날, 해가 달을 낳았다달이 바다를 낳고바다는 늬 형을 낳고엄마는 늬들이 첨벙거리며 놀던 계곡을 낳았다피라미 떼 가재 떼 쉬리 떼를 낳은 계곡은수천 밤을 지새우며 인간들의 번뇌를 빨아들이는 연꽃을 낳았다연꽃은 가을을 낳고, 가을은 봄을 낳고봄은 꽃길을 낳았다꽃길이 낳은 저 웃음들웃음이 울음을 낳고비통의 겨울은 매화를 낳았다매화 한 그루의 향기는 재두루미를 낳고,재두루미는 늬 애기를 배고 구만리 창천을 넘어 바이칼을 낳고 있구나그 호수, 데칼코마니를 낳았다그림자는 드디어 시간을 낳았다 너는 무엇을 낳고 싶으냐 영원아! -졸시, <시마 詩魔, 4 -낳음에 대하여> 전문 인문학은 누군가가 탄생시킨 지고지순한 글들의 집합체다. 한 줄의 글을 위하여 밤을 지새워본 사람은 알 수 있다. 그 과정의 지난함을. ‘글’이란 한 영혼의 고뇌에 찬 시공간의 어둠이 빛으로 치환되는 유레카의 꽃이며 열매며 씨앗이다. 새알의 껍질이 한순간 줄탁동시의 인연을 만나 생명으로 세상의 빛을 받는 그 일! 글은, 닭이며 달걀이며 새이며 새의 알이며, 그것의 껍질이며 붉은 핏덩이이며 태양이며, 새해 첫날의 일출이다. 글은 낳는 일의 극점에서 ‘오롯한 의미’를 획득해야 그 가치를 품고 세기의 비판적 독자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하므로 수천 년을 통과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아있는 글, 책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하랴! 그저 눈으로 읽으며 그 글이 ‘어렵다, 모르겠다, 시시하다’라고 했다면 독자로서도 다시 한 번 더 깊이 있게 음미하며 곱씹어볼 일이다. 자기의 취향이 아니면 읽지 않아도 된다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내 취향이 아닌 글로 인해 스스로의 맹점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누군들 머리를 쥐어뜯으며 책을 읽는 것이 즐겁기만 하겠는가. 그러나, 고전은 읽는 과정이 바로 뇌작용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는 행위이다. 뇌세포들은 그 과정에서 무수한 시냅스의 세포들을 자극하고 그 자극은 우리가 두려워마지 않는 치매 예방의 최대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쉬운 책과 어려운 책, 심지어는 난해한 책, 그것들의 가치를 논하기 전에 그 저서를 갈무리하기 위해 생애를 걸었던 저자들의 고뇌에 찬 노력과 탐구정신을 어찌 외면할 것인가. 그들이 탐구했던 그 길이 책을 읽으며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만큼의 시간동안 우리는 탐구할 수 있으며 논리적으로 사색할 수 있으며 지식의 스펙트럼을 꽉꽉 싸매어 통합할 수 있다. 새해 일출을 보면 한 순간의 눈부신 태양을 확인하는 것 같지만, 그 태양빛은 수십억 광년의 시간과 그 이상의 공간을 가로질러 온 에너지다. 그 빛은 순간의 빛이 아니다. 순간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순간의 에너지로 왔다가 사라지는 단순함이 아니다. 태양빛처럼 온전한 완전함이 한 권의 책과 같다면 너무 과대평가한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보다 더 뜨겁게 우리의 삶을 뒤집어버리는 책들은 많다. 다만, 스스로의 선택의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과정처럼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을 따름. 세계적인 대문호 헤르만 헤세는 말한다. “정신적으로서 현재 속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는 부질없고 무의미한 것이고, 역사나 고전에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데서 정신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곧 신간 서점에서 고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책을 고르는 안목이야말로 지혜로 가는 정통한 길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많은 이에게 회자되는 중용 속의 말 중엔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시고 먹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맛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중용 제4장, 4-2)라는 말도 있다. 몸으로부터 감지되는 맛! 단순한 음식 차원의 맛이 아니라 문명의 고양된 의미로서의 맛은 인간 정신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지식과 같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스스로의 인생관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맛으로서의 책읽기, 맛으로서의 인문학을 통해 우리의 정신은 어떤 맛의 멋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튼실한 나무뿌리의 역할까지 어떻게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나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라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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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명작 읽기 /셰익스피어의 ‘햄릿’.명작 읽기는 위험하다. 모든 명작들은 최소한의 오해를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의 독자들은 그 오해의 비평적 관점을 자신들의 진정한 느낌보다도 훨씬 신뢰하면서 명작을 접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명작을 접하는 행위는 들려오는 소문을 개인적 철학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면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인내와 자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항간으로부터 들려왔던 보편적 진실보다 더 특별한 매력이 발견되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읽다보면 스스로 더 만족스러운 문학적 감동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읽을 때도 예외는 아니다. 너무 유명해서 사실 모두가 다 읽었다고 착각할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쩐지 자신없어하는 책 중 하나임엔 틀림없다. 이야기 줄거리야 너무 뻔하다. 한 인간의 비극적 성장기, 한 왕궁의 비극적 피비린내, 한 삶의 피할 수 없는 운명...... 대립과 갈등, 죽음 속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막스와 대단원! 얼마나 식상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서사적 스토리를 읽기 위하여 ‘햄릿’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왜 햄릿인가? 우선 햄릿을 통하여 오해되는 너무도 유명한 한 구절을 들여다본다. "To be? or not to be?" 독자들은 곧장 대답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은 이 지점에서 가장 어리석은 회의를 하고 우유부단하며 결정적인 죽음 앞으로 걸어가버린 운명에 처해진다고 재단되어 왔다. 성격 창조의 한 캐릭터로서 셰익스피어는 작가 스스로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햄릿형 인간’을 창조했다는 오해를 뒤집어쓰고 만다. “이 흉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다오” “살인!” “흉악한 살인이지, 최선이라 할지라도, 허나 이건 가장 흉악, 해괴, 무도하니라” “서둘러 알려주면 명상처럼, 아니면 사랑의 상념처럼 빠른 날개로 복수에 돌입할 것입니다.” “빠르구나.......” -- ‘햄릿 제 1막 5장’ 일부 내용--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면서 사건이 희대의 살인사건임을 알게 되며,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감성적 직관과 과학적 예측, 빠른 행동을 독자에게 보여주면서 속도감 있게 대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을 손아귀에 넣고 종횡무진 무대를 휘젓는다. 지루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극의 사건들은 독자를 엮어간다. 막과 막이 거듭되면서 비극으로 시작된 서사는 더욱 더 비극적으로 치닫는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한 구성능력은 전지구적으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극이란 무엇인가? 그냥 슬픔인가? 비극은 존재의 밑바탕을 흔드는 구조로서의 비극이다. 존재의 밑바탕에 깃들어 있으면서 삶의 가장 극적 요소를 동원하여 느끼게 하고, 그 안에 인간의 혼합적 심리를 함께 깨닫도록 장치한 문학 장르가 바로 셰익스피어가 차용한 비극이다. 물론, 최초의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16세기의 중앙에 서 있으면서 가장 근대적인 요소를 도입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정도로 시대를 앞서 열었던 파격적 문학작품인 것이다. 그 시대의 혁명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적 정서인 종교적 복종심리, 다시 말하면 어둠 속에서도 그것을 어둡다고 말하지 못했던 비윤리적이며 억압적 피조물로서의 언어들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기어코 한 시대를 뒤집어엎는다. 그 결정적 무대의 정점은, 회의적이면서 실존적인 자기 성찰적 언어로 부조리한 삶의 구조를 뒤집어 보여주는 데에 있다고 한다면 ‘햄릿’은 그 시발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대,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가 과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존재적 삶의 새로운 무대를 열었다고 한다면, 셰익스피어는 희곡형식인 비극을 통하여 존재의 가슴속 울분, 갈등과 부조리한 삶을 성찰하면서 문학적 선두의 역할을 해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햄릿’은 그러한 의미로서 복원되어야 할 문학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저 유명한 햄릿으로만 읽었다면 그저 그러한 언어적 완벽성과 재미, 어떤 인간형으로서 창조되었기에 이리 흥미진진할 수 있는지....성격창조로서의 전범....대사 대사마다 드러나는 갈등 구조 속의 삶의 고갱이....그렇게 마무리하고 말 것이다. 다시 보는 ‘햄릿’은 등장인물의 배치도 파격적이다. 왕과 왕비, 권력자와 귀족들이 한데 얽혀 숨 막히게 극을 리드한다. 그들은 일순 수직적이지 않고 지극히 평행적이다. 계급적 속성이 이미 파괴된 형식이다. 그들의 대화나 서로에 대한 시선을 가장 인간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문학적이다. 인간과 신, 유령과 현존인물이 완벽하게 횡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삶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인물들은 우리의 현재적 삶에 초점을 맞추어 놓은 것처럼 ‘현대적’이다. ‘햄릿’은 한순간도 주체적이지 않을 때가 없으며, 논리적이지 않을 때도 없다. 주변의 인물들을 에워싸고 있는 불투명한 심리를 끝없이 밝히며 독특한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독자인 현대인이, 우리가 우리를 성찰하게 해 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가 그 시대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은 모든 고전의 보편적 가치이기도 한다. 탁월한 작가들은 그 지점에 방점을 찍는다. 고전이라고 하면서도 신선하며 창조적인 감성을 선물해주는 읽기의 정수가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들려주기 어려운, 직접 읽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한 모금 차디찬 옹달샘물의 참맛! ‘햄릿’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고 그 오해가 오해로 끝날 수는 없다. 직접 읽으면서 서로에게 풀었던 오해의 텃밭이 더 밝고 더 거칠게 파헤쳐지는 시간들, 그것만이 셰익스피어가 펼쳐 보여주려 했던 문학적 다층성에 다가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층의 성 속에서 햄릿은 외친다. “칼끝에 독이라고! 그럼, 독이여 퍼져라.” 비극은 독 속에서 살아야 하며 독 묻은 칼끝에서 죽어야 하는 인간의 삶이다. 그 독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정신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에 있다. 우리는 그 독을 극복할 수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햄릿의 고뇌에 찬 포효는 우리의 귓바퀴를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To be or not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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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하루’를 위하여.‘하루’는 그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일까. 이 소설은 많이 러시아적이다. 러시아 아니면 결코 기록할 수 없는 배경이기도 하고, 러시아 작가가 아니면 결코 체험하기 어려운 시베리아의 춥고 배고픈 수용소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이 그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고, 그들은 하나같이 수용소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며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억압과 함께 사상과 몸을 감금당한 후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들의 수용소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혹한의 겨울, 영하 삼사십 도의 추위, 그것도 멀건 ‘양배추 죽’이 양반일 정도로, 건더기는 찾아볼 수 없는 후루룩 국물을 먹기 위해서 온갖 머리를 써야 하는, 지독한 강제노동으로 지친 시간들 속에서 허기조차 때울 수 없는 하루 30그램의 빵을 배급 받아 아끼고 아껴 먹느라 온갖 지혜를 동원해야 하는 그런 곳! 인생의 하루, 일장춘몽의 하루, 하루 같은 십 년, 먹을 것을 갈취당하지 않고 먹을 수 있고, 아니 죽 한 그릇을 속여서 두 그릇을 먹을 수 있었던, 장화를 수선해주고 돈을 벌 수 있는 작은 줄칼 하나를 숨기고 들어올 수 있었던, 실로 꿰매어놓은 빵이 도둑맞지 않아서 미소 지으며 먹을 수 있는 그런 하루, 수용소 내의 열흘이면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처참한 영창에 들어가지 않은 하루..... 그래서 거의 행복했다고 느끼는, 담배까지 사서 들키지 않게 피울 수 있었던 하루..... 그러나! 십 년형을 언도받고 충실히 복역했지만 끝나면 또다시 십 년을 더 살아야 하는 죄수의 하루, 영원 같은 하루, 하루 같은 영원의 의미가 솔제니친의 하루가 아닐까. 지나온 세월, 십 년을 되돌아본다. 그래 좋았다! 적어도 하루 같은 십 년은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모두 떠올릴 수 없다 하더라도, 생생한 꽃빛의 하루들도 많았다. 그저 아름다운 삶을 추구했던 건 아니지만 저들의 수용소에 비하면 지독히 행복했던 하루들이 추억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 안에 시도 있다. 시를 쓰느라 고민했던, 책을 읽느라 밤을 새웠던, 많은 시간들이 나를 감싸고 있다. 감히 러시아적 삶 속에서 태어난 저 명작들을 넘볼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나대로 내 삶의 씨앗 속에서 발아시킨 문학적 열매를 낳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다. 고통의 강도만큼 태어나는 세기의 작품들.....하루를 살아도 그렇게 살아 남겨놓은 작품들.....부러운가? 그러나...... 요즘, 자꾸 ‘빵’이라는 말이 처절하게 들린다. ‘배고픔’속에서 살아왔던, 아니 그저 몸의 허기가 아니라, 존재적 허기랄까? 그런 세월들이 내게 주었던 경험들이 수용소 삶의 여러 날들을 더 온전히 공감하게 해 준다고나 할까. 어쩌면 그저 상상 속의 공감이라고 할 정도로 결코 일치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는 해도 인간에게 억압과 배고픔과 추위는 참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할 정도의. 그래서 어제도 빵 몇 개를 샀다. 아픈 엄마께 갖다 드리고 식탁에 올려놓았다. 바라볼수록 수용소 안의 죄수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그 빵에서 풍기는 고요한 향기가 하루를 의미있게 살도록 도울 것 같아서 한 쪽 떼어 맛있게 먹는다. 고맙다 삶아!라고 속으로 웅얼거리면서...... 몇 주 전에 문학기행차 갔던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과 윤동주 문학관, 그 즈음 보았던 ‘동주’라는 영화, 요즘 내게 찾아온 일련의 삶에 대한 주제들은 일관성 있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듯도 하다. 특별히 요즘인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삶의 본질들은 꼭 역사 속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도 보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다면성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솔제니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그러한 부조리를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저 느끼지 못하고 느긋하게 살고 있을 뿐. 짐짓 모른 체하고 즐기고 있을 뿐. 그러나 어찌 그 즐거움이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저 수용소의 삶처럼 비참한 일상에 매몰되지 말라는 법도 없잖은가 말이다. 세상은 여러 모로 비참하고 참담할 일 투성이다. 돌아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모든 문명이 눈부신 시대 21세기! 이 시대의 주인공인 우리는 여전히 행복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지구인들은 행복한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면 안 된다는 듯이 소수만 즐기는 지구적 삶은 괜찮은 건가? 한국적 사회는 어떻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길들을 우리는 잘 걷고 있는 것일까? 강한 나라들은 강한 나라인 채로, 약소국은 또한 약한 나라인 채로, 그 안의 민중들은 주인의 삶을 살기 어렵다. ‘신자유주의’라는 몰상식한 체제는 자유라는 허명을 내세우며 줄기차게 타인의 삶을 억압한 대가로서의 행복을 쟁취하도록 부추긴다. 무한경쟁만이 대안일까? 소박한 행복을 가져와야 할, 철학도 인문학도 필요 없다는 게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결론이다. 학문의 틀은 우수한 인간이라는 목적론적 환상에 사로잡혀 보통의 사람들은 묻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정의하는 것만 같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너무도 수용소적이다. 권력적이다. 영웅적이다. 솔제니친은, 신을 향한 기도는 죄수들이 써내는 진정서와 같다고 생각한다. 말해봤자 꿩 구워먹은 소식, 거절당하기 십상인 말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유 아니면 아무 가치가 없는 수용소의 죄수들에게는......신도, 무능력한 한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 번도, 그 누구도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로워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누릴 수 있을 때, 보통사람들이, 아니 죄없이 갇힌 죄수들이, 지금 삶의 죄라는 고삐를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 권력자들의 힘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민중들이, 세상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았다고 할 때나 진정한 가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모두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을 전복시키는 신자유주의적 발상들은 소수만을 위한 폭압일 뿐이다. ‘자유’라고 다 같은 ‘자유’는 아니다. 솔제니친,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의미는 비로소 그때 진정한 의미를 쓸 수 있고,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하루!’ 안을 들여다본다. 이 순간의 진정성이 그 하루가 아닐까? 카르페 디엠! 한 번도 그대는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대는 어제!라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 줄기 새파란 천둥번개였다 거친 바위를 퉁탕거리는 계곡물이었다 지금도 온몸이 뜨거운 능소화로 피어나는 정오 물속에 한목숨 풀어헤쳐버리는 물푸레나무 난바다 펄떡거리는 상어 한 마리, 수평선에 젖 물리는 돌고래 푸른 영혼이었다 졸시, <바람-카르페 디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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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역사와의 만남이다.해묵은 지혜는 역사의 정체성이다. 역사 속의 케케묵은 사건들은, 그 한꺼풀 비밀을 벗기면 맛볼 수 있는 마술처럼 지혜로워지는 역설이 있다. 사람의 삶이 수십억 년의 두께를 지녔다고 생각하면서 그 역설 속에서 지금도 지혜를 발견하기 위해 한 장 한 장 인문학적이며 역사적인 책자를 들추고 있다면, 그건 책 읽기의 괴로움이 주는 또다른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오늘 그대는 무슨 책의 어떤 구절 앞에서 호흡을 멈추었는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그 과거는 현재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왜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해석인가. E.H.Carr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얻었던 지혜는 ‘역사’라는 그 무구한 진실들이 때론 180도 새로운 과거로 거듭나거나, 명백한 통찰을 통해 역설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명제였다. 그러니 ‘역사’가 흔들릴 수 없는 진실(사실)이라는 생각은 애시당초 미혹이며 까마득한 시간의 더께처럼 파헤쳐져야 할 미명의 빛이라는 것이다. 여수의 ‘여순사건’ 역시 그러하다. 올해로 70주년, 그 역사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적 오리무중으로 묻혀있었다. 많은 증언을 통해 증언집이 만들어지고,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되었으며, 묻혀있던 사실들이 발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역사’는 바른 ‘역사’의 관점에서 기록되지 못 했다. ‘국가사회적 정의’는 개인적이며 사실적인 그 사건이 가진 ‘진실’을 밝히기를 꺼려했으며 그 진실 속에서 맞아야 할 돌멩이를 피해갔다. 피맺힌 상처와 어이없는 패찰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너무도 많은 ‘피해자’들의 한은 지금도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가장 보수적인 한 줄 명제를 되씹게 만든다. 이제 좀 더 지혜롭게, 더욱 진실하게 그 실체에 다가가야 한다. 우리는 거창한 인문학적 학문의 시간이기 이전에 우리네 이웃의 아픈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역사를, 그 역사의 그늘을 바라보며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시는 그러한 사유 안에서 탄생할 것이며, 한 줄의 글은 그러한 관심 속에서 더 폭넓은 지혜의 바다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생각에 어떤 의견이 틀렸다는 것은 곧 그 의견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생명을 북돋워주고, 생명을 보존해 주고, 종족을 보존해 주고, 나아가서는 종족을 창조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니체 한 역사가 있다. 한 의견이 있다. 그 의견에 대한 또다른 해석이 있다. 그 일련의 사태가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떠나서, 얼마나 생명을 북돋워주고 종족을 보존해 주고, 또한 종족을 창조적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두고 역사와 인문학이 만나는 최적의 상태라고 한다면 오늘 하루, 인문학적으로 행복한 삶의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날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애기섬’으로 향했다. 여수 앞바다, 그 불행했던 시간을 지금도 침묵으로 간직하고 있는, 작은 배 하나 정박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엄마와 아기가 나란히 몸 사리고 있는 바위섬. 묶고 묶고 묶어서 태우고 태우고 태워서, 울렁임도 삼키며 난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왔다 125명, 아니 한맺힌 가족들의 피울음까지 풀리지 못해 아직은 얼음 박인 전생애의 심장까지 수장 당해버린 사람들이 애기섬에 당도했다 애기섬은 보았는가 한없이 출렁이는 바다, 잔잔히 침묵하는 물결 비통으로 울부짖는 유족의 오열을 등대는 외면한다 사람이 사람을 쏘았다 죄를 뒤집어 씌워 사람이 사람을 창칼로 찔렀다 이데올로기의 청상가리를 흩뿌리며 물을 수도 없었다 그들의 아내, 그들의 딸, 그들의 형제자매, 그들의 부모, 죄는 죄를 낳고 미혹은 미혹의 샴쌍둥이를 낳았을 뿐 어둠을 헤쳐 나아가라고 등대를 세웠지만 애기섬은 지금까지 한순간도 제대로 빛나지 못했다 70년 전 그 하루, 여순사건 보도연맹연루자학살이란 태아 하룻빛 강아지처럼 탯줄을 자르지 못해 역사의 어미는 끝없이 자궁을 벌리고 출산혈을 흘린다 피어날 수 있는가 저 애기섬의 어린 꽃! 아직도 짜디짠 바닷물에 젖어있는 배냇저고리가 아직도 붉디붉은 동백의 절명으로 떨어지는 처참이 사르르 말라 잠들 수 있을까 70년을 흔들려온 바다가 내 공허를 향해 흰 국화 한 송이를 건네주었다 오늘 그 꽃송이를 묻은 가슴으로 돌아오는데 애기섬 깎아지른 절벽이 무지렁뱅이의 뺨을 날카롭게 후려친다 -- 졸시 <애기섬은 절벽이다> 전문 E.H.Carr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말도 있다. “역사에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판단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인과관계는 해석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의 탐구는 가치와의 관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인과관계의 탐구의 배후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항상 가치의 탐구가 놓여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탐구는 가치탐구이다. 아니 인문학이란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가치를 숙고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여수는, 아니 여순사건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가. 내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황당하게, 억울하게 죽어갔다면, 그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어떤 지혜를 찾도록 하는 것일까. 정치권력의 부패와 권력의 오류를 향해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더 이상 훼손시킬 수 없도록 하는 일, 그런 일의 발생을 막는 일은 무엇보다도 진실한 내 삶의 가치에 우선하는 일일 것이다. 10월의 가을 하늘이 맑고 투명하다. 저 투명이 오늘 하루를 온통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행복은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역사적 하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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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신화를 재구성하는 일이다.나는 나의 신화를 알고 있다. 신화를 안다는 것, 그건 신화를 산다는 것이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신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신들의 이야기라고 지레 멀리로 떠밀어두고 모른 체 하루하루를 우울하게 견딘다. 그 완벽함에 전혀 못 미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라며.....그런가? 신이 따로 있다면 어디에? 우리는 읽었다 신의 소재를 밝히는 대서사시 호머의 일리아스를, 알고 싶지 않은가? 나로서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신화를 알고 나서 신화를 살게 되었을 때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흥미진진하고 신났다. 우선 그건 삶의 한층 깊은 곳에서 놀고 있노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깊은 곳은 어디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면서, 내가 태어나기 위하여 거쳐 왔던 수억 년도 더 너머의, 원형질의 우주 저편에 있는 존재의 근원인 곳, 또한 수억 년도 더 미래 저편으로 살아갈 그런 곳이다. 그건,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을 지칭하며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신화는 그래서 신화다. 신들의 이야기 속에 무슨 인간의 상상 속으로 가져올 그런 한계가 있다할 것인가. 그러나 진정 그런가? 인간의 한계와 신화는 다른가? 호머는 이야기한다. 신화와 인간의 삶에 대하여. 그 완벽한 일체성을 일리아스에 구현해놓았다. 나는 호머를 읽으며 적어도 그 일체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신과 인간은 하나다’라는 놀라운 진정성!신화는 인간의 경험 속에서 창조된 이야기일 뿐이다. 인간의 생각(포세이돈)에서 인간의 입(헥토르)으로, 인간의 삶(네스토르)에서 인간의 상상력(아폴론)으로, 인간의 사랑(헬레네)에서 인간의 변화무쌍(아프로디테)으로, 인간의 질투(헤라)에서 인간의 온갖 죄악(아담과 이브)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에로스)에서 인간의 무력함(하데스)으로, 인간의 한계(아킬레우스)에서 그것을 뛰어넘은 인간의 무한자유의 힘(예수, 부처)으로.....신화는 끝없이 진화해왔다. 생명체의 진화가 다름 아닌 무한히 변형된 생명들의 또다른 모습인 것처럼 신화 역시 삶의 뿌리를 딛고 변화해온 인간의 이야기들이다. 그 주인공들이 신의 모습을 빌려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신화의 면면은 ‘인간의 삶+알파’다. 그 알파가 바로 신들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위대성은 신화를 바탕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곳곳에서 생성되어 창조, 부활하고 있다. 일리아스를 읽다보면, 참 웃기는 게 신이다. 무슨 신이 그렇게 오락가락 변덕스럽고, 무슨 신이 그렇게 속도 좁고, 무슨 신이 그렇게 질탕 바람쟁이이며 권력욕에, 애욕에 빠져 파도를 일으키고, 인간의 순수한 목숨을 함부로 넘보더란 말인가. 인간의 세속적이며 가장 인간적인 유형 속에서 날마다 발견되는 그러한 인간적인 모습의 신들과 한바탕 어울려 꽹과리춤을 추는 인간들. 그러나 통속적인 춤만은 아닌, 역설적이고 통쾌한 춤들로 난만한 전장! 진지하고 이지적이고 영웅적인 인간의 뒷모습 속에 가장 질투심 많은 신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타나 삶의 웅덩이를 파며 그 흙탕물 속에 모두를 빠트린다. 그러면서 그들의 고통과 용기와 사랑과 절망을 소조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지나왔을 때 그 신들의 장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 타고난 재주? 타고난 의지? 타고난 운명?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라면, 또한 모든 신은 무용지물이다! 신(신화)의 의미를 좀 더 논리적으로 밝힌다면 다만 ‘인간인 주인공이 살아가기 위한 방편’일 뿐. 인간이 없는 곳에 신은 존재할 수 있는가? 신이 창조한 인간과 죄와 선악과.... 그에 대한 답변이 가능한가? 어찌 그러한 변증법이 통용되어 왔단 말인가? 그것에 관련된 대답이 나의 신화가 탄생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화다. 나라는 인간의 삶의 어깨 위에서 신들은 ‘+알파’로서 존재한다. 나는 죽음을 보았다. 죽음 가까이에서 그 지점에서 만날법한 신들의 아무런 눈빛도 음성도 작은 기미조차도 없음을 확인했다. 죽음과 맞닿은 시간에도 신은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나라는 인간은 다만 삶에 대한 가장 확연한 어떤 경험 속의 한 생명임을 인식했을 뿐이다. 그 경험은 나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관념이란 것을 확인하게 해 준 내 생의 최대의 축복이었다. 삶은 삶으로 시작해서 삶으로 끝날 뿐인 지고지순한 생명의 꽃이다. 죽음은 내게 없다. 삶의 과정으로서 한 생명체가 영원한 자연 속으로 진입하는 통과의례일 뿐. 그러하므로 어찌 지금의 삶이 신화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랴. 내게 창조주로서 기능한 부모와 자연과 함께 우주의 질서가 영원히 되풀이되고 있으며, 그것을 믿는다. 앞으로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를 통하여 내 아이들이 그 질서를 지속시켜 줄 것이며, 또한 나의 개체는 한 개체일 뿐 아니라, 모든 영속한 생명의 씨앗이다. 그 안에 깃든 신성이 바로 나라는 인간이다. 저 나무와 꽃과 바다와 산맥과 지렁이와 개와 다람쥐.....엊그제 향일암에서 본 동박새의 지저귐과 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지금은 돌의 형상으로 남아있는 거북이....내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저 먼 바다에서 신비로운 숨을 내쉬고 있을 고래.....그리고 바윗덩이의 자취로 기념된 원효대사가 참선했다는 그 터! 그 터의 신화! 나라는 인간은 그 터에 앉았던 원효의 영혼과 무엇이 다르며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나는 그고 그는 나다! 결론은, 신화란 바로 현재의 내 생각과 상상 속의 창조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신화를 창조할 것인가? 그건 바로 내 자유일 뿐! 누가 어떻게 나에게 나의 신화를 창조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의 신화다, 그러므로 나의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 내 삶이 지속되는 한. 그러나 그건 한계의 의미가 아닌 영원 속의 삶의 지속이다. 나의 즐거움은 그 선상에서 춤추는 일상이다. 누가 그 춤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어제도 내일도 나는 신화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 무슨 신화라고 특별히 의미부여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신화다. 태양과 바람과 불과 물과 금강석 그 존재들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 숨 쉬고 있는 나의 신화. 모든 의미가 가능한 텅 빈 충만의 신화적 우주가 나의 시간이요 공간이다. 노자가 공자가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니체가 보여준 다만 살아있음의 경험이 신화라는 말이 가슴을 꽉 채운다. 김남주가 지금 죽었는가? 백범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는가? 베토벤이 없는 곳이 어디인가? 그들(나)에게 사라짐은 없다. 더구나 허무는 없다. 불행도 없다. 좌절도 없다. 그들의 삶이 시간만인가? 공간만인가? 그들이 태어난 그때(****년 *월 *일)가 그들의 삶으로서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으로서 완전히 설명되는 그들의 삶(역사, 신화)인가? 아니다. 그들은 죽음(형식적인) 이후로도 수천 년, 수백 년,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나 사이에 다만 ‘영원히 지금’인 ‘지혜’와 ‘도’와 ‘인’과 위버멘쉬’와 ‘조국은 하나다’와 ‘민족의 통일’과 ‘음과 악기와 인간이 합일된 선율’이 있을 뿐. 우리가 맘먹기 나름인 이 시점에ㅡ,우리가 그 ‘선택의 선물’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엔가 있단 말인가? 진정 지혜가 아닌, 도가 아닌, 인이 아닌, 위버멘쉬가 아닌, 통일로서의 하나가 아닌, 다른 그 무엇에 내 인생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다른 말이 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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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괴테와 에거만’적인 만남이다 (하)“태양빛이 따가울 때면 이보다 나은 피난처는 없어. 이 나무들 모두를 나는 사십 년 전에 직접 심었고 그것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아왔었지......” 괴테는 이러한 삶의 여유를 실제 환경의 리얼리티를 토대로 적용해서 살아가면서도 대가답게 창작을 왕성하게 하는 충실한 리얼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너무나 넓고 풍부하며 인생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시를 쓸 계기가 모자라는 일은 결코 없어. 하지만 모든 시는 어떤 계기에서 쓰여야 하네. 말하자면 시를 쓰는 동기와 소재가 현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거지. 그때마다의 특수한 경우가 보편적이고 시적이 되는 것은 시인의 손길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네. 이런 의미에서 나의 모든 시는 그 어떤 일을 계기로 쓰였으며 그 모두가 현실에서 자극을 받고 현실에 그 뿌리와 기반을 두고 있어. 그러므로 나는 허공에서 지어낸 시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네......” 또한 괴테는 예술창작의 과정에서 삶의 진정성을 함께 느끼고 그것을 어떻게 향유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담담히 피력하고 있다. “매너리즘이란 언제나 완성만을 염두에 두면서 창작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태도야. 그러나 순수하고 진정으로 위대한 재능은 창작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누린다네. 로스는 염소와 양들의 모발과 털을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그렸는데, 그 끝없이 세세한 묘사에서 우리는 그가 작업을 하는 동안 나무도 순수한 행복감을 누렸을 뿐, 완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네. 그러나 재능이 시원찮은 자들은 예술 그 자체에 만족하는 일이 없어. 그들은 창작을 하는 동안에도 완성된 작품이 가져다주리라고 예상되는 이득만을 눈앞에 그리고 있다네. 하지만 그러한 속물적인 목표와 방향으로부터는 아무런 위대한 것도 생겨날 수가 없겠지.” 누군가는 삶의 일상적이며 창조적인 시간 속에서 지독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예술가라는 특별한 시간을 영위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허명을 지향하며 지지부진한 시간을 살아간다. 왜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가를 괴테는 ‘삶의 경험적 몰입’과 ‘목표지향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의 삶 그 자체를, 삶 그 자체의 과정을 즐기고 창조하는 작가, 예술가들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 특히 예술가가 아닌 경우라 해도 모든 평범성 속에서 개별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고갱이를 살아갈 한 방식에 대한 통찰이라 하겠다. 인문학적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무명의 시인인 필자 역시, 그의 작품을 통해 시 한 편을 일상의 감각 속에서 가까스로, 그러나 행복한 진통 속에서 생산한 기억이 있다. 붉다 못해 뜨건 핏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면 한 알 한 알 손톱을 세워 줍고 있는 햇살 아래 서늘한초록의 추억도 새빨간 초경을 제 몸에 두르고 일어선다 살구는 푹신! 입안에서 흰 식욕을 향해 침을 뱉는다 자두는 설컹! 언니의 젖무덤에 우주를 붓질하는데 원고지 화선지가 한 시인의 목에 목마를 탄다 시(詩)!너는 무엇이더냐네 생명조차 살구의 하루에 온몸으로 젖어드는구나 베르테르, 그 비통한 숭고로 울부짖던 자존이 자두를 닮았다 시(詩)!마지막을 휘돌아 바톤터치할 이유가 있다면 베르테르,한 육체의 목마름을 적셔줄 고귀한 한(恨) !단 한 번의 이별, 그것으로 완성해버린 만유인력은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자두를 날려 보낸다, 살구!떨어져 으깨어진 자리에서 언니는 비로소 아기를 밴다 으앙 으앙! 아이 좋아라 저 푸르른 새벽의 종소리, 붉게 터져버린 지구 한 조각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 졸시, <자두 살구 그리고 베르테르> 전문 그들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는 역사 속으로부터 구해온 대가들의 작품성에 대한 성찰, 그들이 누려온 삶의 진정성에 대한 인생론이 꿈틀거린다. 그 인생론이야말로 현대적이며 현세적인 철학적 담론이다. 그 밑바탕에 문학과 예술이 있다. 그러므로 많은 예술가들은 오랜 세월을 지나온 지금에도 괴테의 사상과 삶의 치열성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대가의 면모를 직접 엿볼 수 있는 문장 속 생활철학과 하루하루의 치열한 생활 경험을,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기계발의 지혜를 선물하는 책, <괴테와의 대화>는 백 번 읽어도 싫증나지 않는 에너지를 선물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문학적 사태인 것이다. 만남은 인문학의 뼈대이며, 인문학적 만남은 삶의 뼈대이다. 예술이란 그러한 삶의 에너지를 가장 정통한 문제의식과 함께 해결하도록 부추기는 고급한 정신 수련 과정이라 하겠다. 문자예술을 창조적으로 구현하는 문학적 일상이라면 더 귀한 그 무엇과 바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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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괴테와 에커만’적인 만남이다 (상)모든 삶은 만남에서 비롯된다. 우주 만물은 태생이 단독적이지 못 하다. 생물학적으로 수컷과 암컷이 만나야 또 다른 생명이 탄생하듯이, 모든 역사는 그 시초가 만남이다. 거시적으로 생명체와 무생물을 나누지 않아도 모든 사물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은 사물을 만나야 사물다워진다.’ ‘인간은 인간을 만나야 인간다워진다.’ 그 만남이라는 사태가 바로 인문학의 본질이다. 문자와 인간의 만남은 그 중 가장 필연적이며 인문학을 이루는 근간이다. 인간 정신은 언어의 소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을 장식한 친숙한 노래 중 ‘만남’이 있다. 대중가요이기 때문에 그 깊이가 인문학적이다 라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을 수 있으나 그 노랫말의 깊이를 떠나 만남은 꽤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지금도 어떤 프로그램의 처음 시간을 진행할 때 애창곡으로 불리곤 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한 인연의 곡진함을 표현하며 그 노래는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마음을 나누며 차 한 잔을 마시며 그 최초의 시간을 의미심장하게 마무리하기엔 안성맞춤인 노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만남이라는 말처럼 다정한 말도 드물다. 어느 땐 그 말처럼 원망스러운 말도 없으리라.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사태라면 즐겨라! 했듯이 우리는 그 어떤 만남도 두려움 없이 소중한 태도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물며, 거대한 인간형의 한 예술가를 만난다 함이랴. 요한 페터 에커만의 책 『괴테와의 대화』를 접했을 때, 가장 커다란 충격은 한 사람의 인생을 한 만남이 좌우해버리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딱 한 사람이 그의 정신과 그의 명성과 그의 삶의 방식을 향해 그렇게 열정적으로 단호하게 아니, 포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니! 1792년 태생인 에커만은 그의 나이 31세, 괴테의 나이 74세 때 서로를 만나 거의 10년을 함께 대화하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칠 맑고 깊은 우물을 판다. 그 책은 1838년에 첫 권을 출간하고 10년에 걸쳐 완간한다. 니체는 그의 책을 두고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고 극찬했다 한다. 그의 책은 한 마디로 문학론의 총체이며 예술론의 본질적 안내서이면서 인생론의 최고봉이라 할만하다. 한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문학 작품을 통찰하며 창조해 가는지, 예술가의 어떤 면면이 그의 예술품을 더욱 격조있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 또한 인간의 삶 속에서 현재적 고민을 어떤 지적 유산을 거름 삼아 그 고민들을 풀어갈 수 있는지, 다감하면서도 보편적이며 인문학적인 언어의 질서를 밑바탕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펼쳐 나아간다. 그 둘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덥고 지루한 여름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상큼 시간을 건너뛰고 만다. “우리들은 아침에 가장 현명하다. 그러나 또한 근심도 가장 많다. 그러나 근심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명함과 같은 것이다. 비록 수동적인 현명함이긴 하지만 여하간 어리석은 자에게는 근심이 없다.” 근심이라는 인간의 일상적 사태를 현명함과 병렬관계에 놓음으로써 삶이 단순치 않다는 깨우침을 주는 말이다. 매일 눈 뜨면 이러저러한 걱정거리를 떠올리며 우리는 창문을 연다. 건너편 바다의 파도가 그 근심을 맞받는다. 그 사이 차차 하루의 일과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한 마디를 내뱉는다. 그래 오늘은 이 일을 해결하러 가야겠다! 근심 걱정으로부터 지혜는 용솟음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자연에 대한 소박한 일상은 우리가 부딪친 뜨거운 여름날의 암담함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그 오랜 자연과학의 진실을 체험 속에서 녹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 조용한 곳에서 사랑하는 자가 그의 연인을 그리워하였도다. 돌에 새겨진 시구(詩句)에 감탄하는 에커만의 회상이다. “이것을 보는 순간 나 자신도 어느새 고전적인 장소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곁에는 반쯤 자란 떡갈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그 전나무 아래에서 맹금의 깃털 다발을 발견한 나는 그것을 괴테에게 보여주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그러한 것이 이 자리에서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로 미루어 나는 이 전나무들이 이 지방에서 종종 발견되는 부엉이들이 즐겨 머무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나무들 주위를 한 바퀴 돈 후에 다시 집 가까이의 큰길로 나왔다. 방금 지나온 떡갈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너도밤나무는 서로 뒤섞인 채 여기에서는 반원을 그리며 그 내부의 공간을 마치동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둥근 탁자 둘레에 놓여있는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태양빛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이 잎사귀도 없는 나무들이 만드는 희미한 그늘조차도 일종의 은혜로 여겨졌다. .... 중략... 뉴스 타임즈 56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