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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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K-교육을 도입해야 한다김광호 여양중 국어과 교사 우리나라는 K-민주주의, K-방역, K-한류 덕분에 대외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제도나 구조를 살펴보면 그렇게 자신 있게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부정부패와 차별의 일상화, 복지의 취약 및 극심한 불평등, OECD중에서 가장 높은 노인빈곤율과 자살률, 가장 낮은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 그리고 복지의 취약성까지 중병을 앓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서글픈 모습이다. 이처럼 차별과 불평등, 낮은 삶의 만족도의 원인을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능력주의를 숭상하는 국민의식에서 찾고자 한다. 이른바 좋은 스펙과 고급 학력으로 형성된 엘리트 카르텔형 구조라고 진단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학교 공부를 공공영역의 진입 및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삼았다. 더불어 그 힘을 이용하여 축적한 경제력을 자녀의 교육 및 신분 상승의 대물림 수단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국, 영, 수 지수가 높다는 이유로 공적 영역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지위와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한 부의 축적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굳게 믿었다. 바로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쳐 엘리트주의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죽을 때까지 시험에 임해야 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대학입시, 공무원시험, 승진시험 등등 하나같이 능력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한 개인의 잠재력을 키우는데 방해를 할 뿐만 아니라 엉뚱한 사람(낙오자, 문제아, 반항아)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자존감마저 빼앗아 버린다. 학교는 다양한 사고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나타내며 하나 둘 재능 찾기에 나서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잠재력을 키우며 성취감을 느끼고 책임감까지 갖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T군은 학창시절 선생님들에게 '낙오자, 문제아'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P양도 마찬가지였다. 두 친구는 성적이 낮았기 때문에 '표준 이하에도 못 미치는 아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각인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된 T군과 P양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T군은 요리사로 P양은 헤어디자인으로 청소년의 우상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 창의적인 삶을 살고 있기에 손님들은 그들의 엉뚱한 상상력에 연일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한번 뿐인 인생을 창조하고 있다. 누가 그들을 인생의 낙오자라고 각인시켰는가? 바로 학교이며 사회였다. 승자와 패자로 가르는 '시간 제한식 선다형 시험 방식'으로 그들의 잠재력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개성 만점인 싹까지 노란색으로 폄훼하며 생각의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학교 및 사회에서 행하는 시험이라는 것이 모두 그렇다. 사고의 깊이보다는 지능의 민첩성을 요구하다보니 지능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소수의 사람을 능력 있는 인재로 인정한다. 학교 및 사회는 왜 선다형 시험의 영역 밖에서 발휘되는 재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슨 이유로 호기심 많은 사람의 사고를 말살하는가? 학교는 아이들에게 산맥 이름을 똑같이 외우게 하는 곳이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산맥을 자유롭게 발견하도록 의욕을 북돋아주는 곳이어야 한다. 학교는 아이의 인간적, 정서적, 심미적인 요구나 욕구를 감싸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얼마 전 어린 시절 엉뚱한 아이로 낙인찍혔던 T씨를 매스컴에서 보았다. 그는 우리 교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씁쓸하게 사라졌다.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정해진 답과 다르게 생각하는 아이를 외면하거나 스스로 잘못된 이방인처럼 생각하게 한다. 바로 학교다. 아이들의 적성, 흥미, 감성, 배경과 관계없이 오직 성적 향상을 목표로 한다. 바로 사회다. " 학교가 지금처럼 좋은 스펙과 고급 학력을 갖춘 분재형 인간만을 양성해서는 안 된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햇빛, 바람, 비, 눈까지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 자연형 인간, 괜찮아 인간을 키워내야 한다. 21세기는 '새로운 처음'의 연속이다. 그 새롭고 처음인 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교육 전반에 대하여 날카로운 매스를 들어야 한다. 그 매스로 휘발성 지식이나 정답만을 요하는 시험을 과감하게 도려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소통과 공감 그리고 연대와 협력을 담아낼 새로운 교육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 과연 우리 교육은 언제쯤 좋은 스펙과 고급 학력을 지양하고 K-교육시스템을 선보일 수 있을까? 그 K-교육만이 엘리트 카르텔 구조를 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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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의 코끼리에겐 미래가 없다.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우린 종종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을 하곤 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그에 맞는 알찬 내용이나 실속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요즘 거리를 걷다보면 대학합격을 홍보하는 플래카드를 많이 볼 수 있다. 학교 및 학원은 우린 정말 좋은 교육을 하는 곳이라고 광고를 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정말 그곳에 나열된 대학 및 학생 이름이 좋은 교육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 빛만 좋은 교육의 민낯은 아닐까?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삶을 클로즈업해보자. "그들에겐 앞으로 스마트폰도 불필요하다. 시계, 옷, 안경 그리고 몸에 부착된 작은 장치를 통해 24시간 내내 많은 정보를 공유한다. 그들의 하루 시작은 개인용 로봇과 인사하고 조리된 아침을 먹으며 가상 조수에게 하루의 일정을 보고 받는다. 그 후 간단한 음성명령으로 무인 자동차를 호출하여 일을 본다. 혹 시간이 있으면 가상현실을 통해 전 세계 곳곳의 관광지, 박물관, 공원, 공연장을 다녀온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가 혼란스러울 만큼 흐릿해진다." 이것은 공상소설의 내용이 아니다. 머지않아 이런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21세기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적응하려면 차별화되고 창의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즉 획일화된 우리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 교육제도는 그러한 능력을 키워주는 것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지금도 대학 및 점수타령만하고 있을 뿐이다. 수능시험 언어영역문제를 잠시 엿보자. "복합지문 - 꿈을 주제로 다룬 시와 혁명을 꿈꾸는 허균의 글을 지문으로 제시한다." 당연히 아이들의 머리를 따분하게 하는 그런 유의 문제이다. 질문은 이렇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다음에 이어질 내용으로 적절한 것은? 화자의 가치관과 유사한 보기를 찾아보자. 다음 중 외재적 감상방법이 아닌 것은?" 등등 몇 가지 정형화된 질문을 던진다. 이런 문제를 푸는 방법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저 이와 유사한 문제를 반복해서 풀고 또 푸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생각 없이도 바로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이 생긴다. 창의적인 사고는 질문자의 의도를 놓칠 수 있기에 금물이다. 이렇게 준비를 철저히 해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을 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의 플래카드에 이름까지 새겨주곤 한다. 아직까지도 중등학교에서는 이런 시험을 통해 아이들의 학습, 지력,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동조한 학생, 교사, 학부모는 무비판적으로 그 척도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있다. 더나가 명문대에 진학할 졸업생을 많이 배출했다는 자부심까지 갖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교육 현장에도 혁명이 필요하다. 정의, 공식, 수준 낮은 문제 처리법을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게 하는 교육 방법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 또한 인터넷으로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직무 능력을 키우는 가르침은 산업사회의 유물로 남겨두어야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들어보며 빛 좋은 교육의 방향을 생각해보자. "이미 있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계산할 수 있다고 모두 의미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는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들의 미래를 가로막는 방 안의 코끼리(모두가 알지만 감추고 싶어 하는 불편한 문제) 교육은 이젠 그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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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탐욕이 낳은 사생아, 코로나.문명은 코로나19라는 사생아를 출산하고 인류에게 매일같이 질문한다. 코로나19는 재앙인가? 아니면 숙명인가? 이것은 분명 인간의 탐욕이 낳은 사생아이다. 지난 2세기 동안 지구촌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많은 사람은 그문명의 축복을 끝없이 찬양하였다. 어느 순간 풍족함이 넘쳐 우울증이나 권태를 체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자살률 또한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우린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있다. 인류가 찬양하는 문명이 조금씩 꽃피우는 과정(중세, 근대)에서 앞 세대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망각하고 있다. 그 문명의 뒤편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으며 야수보다 더 잔인한 살상(殺傷)이 있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앞 세대보다 생활환경이 좋아졌고 먹거리도 풍부해졌지만, 삶에 대한 행복지수가 높아졌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는 석기시대에 비해 수천 배 이상의 힘을 지녔으면서도 그만큼의 행복은커녕 더 많은 힘과 부를 가지려고 욕망의 칼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그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 바로 코로나19이다. 요즘 지구촌 곳곳이 코로나19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찬양했던 문명이 왜 이렇게 우리의 목숨을 빼앗지 못해서 안달일까? 문명은 우리에게 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한편 코로나19는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배회하면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주목할 현상은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코로나19를 대적하지 못하고 호되게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명은 코로나19라는 사생아를 출산하고 인류에게 매일같이 질문한다. 문명은 정말 좋은 것인가? 인간은 문명을 제어할 수 없는가? 문명은 넋 나간 듯 인류에게 말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문명이란 말인가? 만약 인류가 지금의 욕망을 잠재우지 않는다면 제2의 코로나19나 제3의 슈퍼바이러스가 나타나 중세의 흑사병에 버금가는 끔찍한 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이다. 아니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다. 그중 인간이 리더자가 되어 지구를 경영하고 있지만, 점점 운영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은 지구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이젠 인간을 위해 희생양이 되었던 동물과 식물에게도 숨 쉴 공간을 남겨주어야 한다. 우린 그들이 느끼는 고통을 예민한 감각으로 느껴야 하며 실제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에 의해 우리가 고통을 맛보고 죽음을 재촉하는 일은 어리석은 행위를 뿐이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문명이라는 도구가 필요하지만, 문명을 삶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마주쳐야 할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몫임을 기억해야 한다. 코로나19는 재앙인가? 아니면 숙명인가? 그것은 재앙도 숙명도 아닌 인간의 욕망이 낳은 부산물일 뿐이다. 과연 우린 욕망을 잠재울 공생과 연대라는 약을 처방하여 공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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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방향에 큰 수술이 필요한 이유.진짜 공부는 온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삶은 무엇일까? 공부는 재미있는 것일까? 왜 살면서 공부를 해야만 할까? 그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만큼 우린 삶과 공부에 대하여 진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아야할까? 평생공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에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삶과 배움을 이야기 한다. 그는 배우면 마음이 흡족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자는 배움의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새의 날개짓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새는 처음부터 하늘을 날 수가 없다. 매일 매일 날개 짓을 반복하다보면 점프 능력이 생기고 위로 날 수 있는 날개의 힘을 기를 수 있다. 그 익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때 그 희열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배움의 흡족함이다. 삶에서 배움은 새의 날개짓처럼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다양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 둘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과 배움은 어떠한가? 우린 삶의 본질이나 이해를 생략한 채 오직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한다. 삶의 본질은 까맣게 접어 둔 채 직업을 찾는 공부만 강요하니 배움이 어찌 즐겁겠는가? 부모가 학교를 다녀온 자녀에게 묻는다고 가정하자. A라는 부모는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하고 묻고, B라는 부모는 "오늘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묻는다. A라는 부모는'어떻게'를 통해 정답을 찾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B라는 부모는'왜'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왜'와'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해보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배운다고 가정해보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눈물 아니 흘리오리다." '왜'라는 질문의 유형은 이렇다. "왜 임이 떠나는데 말없이 그냥 보낼까요? 왜 떠나는 임에게 꽃을 뿌려주죠? 왜 떠나는 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죠? 우리 각자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보기로 해요?"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부터 이별 그리고 질투, 성숙 등등 개개인의 경험과 배경지식에 의해서 수많은 상황들이 생생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렇기에 답은 하나가 아니가 여러 개 일수가 있다. '어떻게'라는 질문의 유형을 생각해보자. "임이 떠나는데 나는 어떻게 보냈죠? 떠나는 임을 위하여 무슨 꽃을 뿌렸죠? 나는 눈물을 흘렸나요? 그렇다면 주제가 뭐죠? 임과의 이별의 슬픔이죠? 그런데 반어법을 사용하여 마음을 반대로 말한 것 같죠. 결국 보내기 싫다는 의미입니다. 아! 그리고 머리와 꼬리가 유사한 말을 반복하고 있으니 수미상관 구조이네요. 알겠죠. 기억하세요." 다양한 답이 나올 수가 없다. 일방적인 가르침이 되어 배우는 사람은 그냥 그 지식을 또박또박 머리에 기억할 뿐이다. 사람의 삶은 다른 색깔과 모양을 갖고 있는데 이 시에서는 하나의 답만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어떻게'라는 질문 유형은 학습자에게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다. 그러나'왜'라는 질문 유형은 배우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삶에 대하여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전자처럼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것과 후자처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공부 방식은 배우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준다. 흔히 말하는 창의력은 무엇인가? 생각에 생각을 더해 또 다른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엉뚱한 생각이요, 그럴싸한 생각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는 것이다.' '왜'라는 배움의 시간을 갖는다면 자신의 이별 이야기를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친구, 고모, 부모 그리고 영화 속의 주인공의 이별 장면에다 또 다른 상상의 날개를 더할 수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말했지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도 지식에 대해서 유사한 말을 한다. "현재 학교에서 배우는 것의 80퍼센트 이상은 곧 필요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100세까지 평생학습을 해야 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현장을 엿보면 '왜'라는 공부 방식보다 '어떻게'라는 공부 방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이들이 그 수업의 결과를 고스란히 떠안고 가야 할 운명일까?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하는 기성세대가 많다. 그것은 그들이 살았던 삶과 교육의 결과물임을 알면서도 삶과 배움을 좁게 해석하는 일상이 안타깝기만 하다. 기성세대여! 지금도 배움의 목적이 명문대 입성과 출세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시대와 동떨어진 배움의 방향과 공부 방식에 큰 수술이 필요함을 말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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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여라 스승의 날이여!아름다운 미담이 넘쳐나는 스승의 날을 아시나요. 계절의 여왕 5월, 아카시아 향기가 나를 설레게 한다. 오늘따라 온갖 나무와 꽃이 자태를 뽐내며 여름 더위를 한결 가볍게 한다. 내일이 스승의 날이다. 갑자기 작년 졸업생 6명이 교무실로 찾아와 스승의 노래를 불러준다. 그냥 가슴이 찡했다.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지만 그래도 한 다리가 만리라고 하는데 기꺼이 찾아준 제자들이 고맙다. 책장 서랍을 열어보니 약간의 먹거리가 있어서 나누어 주고 차 한잔 끓여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었다. 잠시 후 아무개 학생이 편지 한 통과 조그마한 선물을 가져왔다. 내용이 궁금해서 바로 편지를 읽어보았다. “선생님! 저희랑 앞으로 1년 동안 봐야 하는데 답답하시죠! 큭큭큭 선생님 저는 매사에 말썽만 피우는 장난꾸러기이지요. 죄송해요. 저도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아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하지만 앞으로는 절제하는 아무개가 될게요. 음 ...노력할게요. 사실 저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해요.” 이 편지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선물인 바로 식혜 한 통이었다. 어머니께서 집에서 직접 만들어서 아무개 편에 보내주었다. ‘그동안 노고에 감사한다’는 말과 ‘선생님들이랑 함께 맛있게 드시라’는 메모의 글을 보면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스승의 날은 해가 갈수록 잊혀져 가는 세태이다. 이번 스승의 날은 마치 주말이어서 조용하게 넘어가겠지만 평일에 있는 날에는 많은 학교가 매스컴에 오르내리지 않으려고 쉬는 경우가 많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촌지나 선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학생들에게 인생과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직업이 이렇게 평가받는다는 것이 애석하기만 하다. 실제로 학교 현장은 차분하고 아름다운 미담이 넘쳐나는데 매스컴과 호사가들은 일부의 잘못된 관행을 마치 전부인 양 호들갑을 떤다. 학생들은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기성세대의 부적한 언행 때문에 알게 모르게 학생들이 삶의 불순물을 조금씩 마시는 것은 아닌지 감히 생각해본다. 6명의 제자 노래와 아무개의 순수한 편지 그리고 어머니의 정성 깃든 식혜까지 세 가지가 한마음 되어 담백한 스승의 날을 맞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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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교사로 산다는 것.H와 K교사는 모두 운명을 사랑했을 뿐이다. 언제까지 삶을 개인의 문제로 돌릴 것인가? 요즘 일선 학교에 기간제 교사가 정말 많다. 이른바 기간제 교사라는 함은 정직이 아닌 비정규직 교사를 의미한다. 더 쉽게 말하면 임시 교사를 뜻한다. 그런데 이 기간제 교사의 대부분은 능력이 출중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 예의도 없고 불성실 하단 말이야. 나 때는 말이야. 선배교사를 하늘처럼 모셨지.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을까." 이런 식으로 개인 경험에 집착하여 기간제 교사를 무시하는 기성세대가 있다. 정말 그럴까? 과연 기간제 교사는 예의도 없고 불성실하며 실력까지 모자랄까? 교육현장에서 힘들고 복잡한 일은 거의 기간제 교사의 몫이다. 물론 부장교사가 앞에서 업무를 이끌어 주지만 많은 일을 기간제 교사가 뒷받침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현직교사보다 업무처리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그들은 정보화 시대에 맞는 인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컴퓨터와 핸드폰 등 디지털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학생들과 소통하기도 쉬울뿐더러 PC를 잘 다루기 때문에 업무 또한 신속하게 처리한다. K기간제교사의 업무를 살펴보자. K교사는 올해 3학년 담임과 학생기획을 맡고 있다. 자율학기제가 실행되다보니 2개 이상의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주말까지 출근하여 독서모임을 지도하고 있다. 당연히 수업은 기본이요 처리해야할 공문은 산더미처럼 넘쳐난다. 그런 K교사는 계약 기간이 끝나면 홀연 다른 학교로 이동해야 한다. 이렇게 K교사의 생활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혹여 어떤 안건에 대하여 개인의 의견을 주장한다든지 업무 처리가 잘못되었을 때는 알게 모르게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다. 누가 그를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가? 누가 성실하면 꿈을 이룰 수가 있다고 말 하는가? 어느 보수적인 H교사는 열심히 노력하면 충분히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꼭 이런 말을 덧붙인다. "나 때는 다 자수성가했어. 학업에 충실하고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일자리를 얻었지. 그렇지 않으면 노동일을 했어.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 다 자업자득이야. 다른 사람들 공부할 때 분명 놀았을 거야." H교사의 말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H교사의 시대에는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대부분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흔하게 사용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가 급변하기 때문에 그렇게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꿈을 쉽게 이룰 수가 없다. 우리 사회는 지난 70년대 이후 능력주의를 신봉하며 경쟁과 성공 그리고 실패를 합리화 하였다. 삶은 행운이나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과 고통으로 얻은 당연한 결과라고 보았다. 우리는 신(神)처럼 스스로 운명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재산, 권력, 명예를 당당하게 취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력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이다. 결국 세속적인 출세는 스스로의 몫이요 성공은 노력한 증표라는 공식이 완성된다. 만약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면 H교사는 운명의 주인공이요 K교사는 운명의 희생자가 되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능력과 성공만을 존중할수록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내가 이렇게 잘 사는 것은 다 내 노력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들의 실패 또한 전적으로 그들의 탓이 아니겠는가. 냉정히 생각해보자. 그들은 노력하지 않았으며 마냥 놀기만 했단 말인가? 바로 이 주장이 더불어 사는 삶과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은 당연한 결과이니 챙길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K와 H교사는 모두 운명을 사랑했으며 운명을 책임지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H교사만이 인생의 성공자요 K교사는 인생의 낙오자란 말은 사라져야 한다. 언제까지 삶을 개인의 문제로 돌릴 것인가? K와 H교사가 상생하고 공존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더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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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야, 너만은 그 진실을 알고 있겠지세월호야, 너만은 그 진실을 알고 있겠지 가슴 울컥하게 하는 세월호 어머니의 편지 우린 마침내 가슴에서 아픔을 꺼냈다 세월호야!!! 너만은 그 진실을 알고 있겠지 K군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무서운 꿈, 바로 단장(斷腸-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의 꿈을 꾼 것이다. “어디선가 어미 원숭이는 새끼 원숭이를 찾기 위해 울부짖었다.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를 잡아 배에 싣고 강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때 어미 원숭이는 필사적으로 배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병사는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다. 어미 원숭이는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K군은 더 이상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거실로 나왔다. 죽음이 죽음을 부른다고 했다. K군은 문득 친구가 그리워졌다. 오래전 4월에 친구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K군은 친구의 어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죄인 같은 마음이 들곤 했다. 어머니는 K군을 볼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요즘은 다행히도 그 친구 어머니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치매를 앓고 있어서 죽은 자식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K군이 병문안을 갔을 때, 어머니는 마침내 가슴속에서 눈물을 꺼내어 보였다. 옛말에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비록 자식이 아파서 죽었지만, 그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어김없이 또 4월이 돌아왔다. K군은 6년 전 진도의 검푸른 바다에서 몸부림치며 죽어갔던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때같은 자식의 죽음을 보았을 때 세월호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되었을까? / 엄마가 다 늙어서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 몇 푼 벌어 보겠다고 일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 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발견된 유가족 한 어머니의 편지 내용이다. 읽고 또 읽어 보아도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K군 친구의 어머니처럼 자식이 아파서 죽어도 잊지 못하는데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던, 자식을 보낸 어머니의 마음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K군은 바란다. 작은 행복을 꿈꾸는 시민들의 삶에 다시는 이런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길 소망한다. 더불어 국가의 존재 이유와 정치인의 역할을 준엄하게 묻는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정치인은 국민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세월호야!!! 너만는 그 진실을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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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로 산다는 것.삶의 신은 허영과 자만에 가득찬 '섬바디(Somebody)'를 원하지 않는다. 오늘은 내 이름 석 자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명(無名)으로 하루를 보냈다. 자유의 옷을 입고 길거리를 활보했을 뿐, 허영이나 자만심은 동행하지 않았다. 왜일까. 낯선 곳에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 그곳에 동화되었으며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로 여행했기 때문이다. 우린 '자부심이 가득한 자(Somebody)'보다는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로 살 필요가 있다. 동안 이름 석 자를 만천하에 알리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몸부림쳤던가. 죽은 후에도 그 이름 석 자를 차가운 돌에 새기려고 얼마나 많은 밤잠을 설쳤던가. 오늘도 아침은 어김없이 나를 깨웠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갑질도 자랑질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는 그저 '평범한 모습(노바디)'으로 나에게 다가 왔을 뿐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하여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낯선 지역에서 자아를 대면했다. 매일 삶이라는 큰 산에 깔려 끙끙거리는 자아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자아(노바디)'를 만났던 것이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아와 그렇게 연을 맺었다. 여행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계절 따라 낯선 지역으로 홀로 아니면 가족과 함께 생각 없이 집을 떠나보자. 평소에 잘 안다고 확신했던 나와 가족에 대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순둥이 인줄만 알았던 아들은 처음 가는 박물관이며 식당을 똘똘하게 안내하며, 평상시에 말이 없던 딸아이는 가는 곳마다 앞에 나서 주문을 하고 서비스를 요청하는 등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익숙한 곳에서 낯익은 사람을 만났다면 타인을 대하는 말과 행동에는 다소의 과장이나 약간의 움추림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직장 상사와의 식사 장소였다면 몸을 많이 위축되었을 것이고, 동창회나 계모임에서 친구들을 만났다면 자신도 모르게 말을 과장하며 목에 힘을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름 있는 자(섬바디)'로 살아가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혹여 그 마음으로 타 지역을 여행한다면 허영과 자만 때문에 스스로 화를 자초할지도 모른다. 낯선 지역과 상견례 할 때는 '아무게'라는 '이름 없는 사람'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 이방인으로 스스로를 낮추었을 때 이색 문화 또한 겸허하게 자신을 감상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이다. 토로이 전쟁 영웅인 오디세우스, 그의 낯선 전쟁 여행을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조국이 아닌 타국에서 적과 운명의 진검 승부를 펼친다. 그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지역에서 낮춤과 경계 그리고 신중한 판단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승리에 도취하여 곧바로 '자부심이 가득한 자(Somebody )'로 변신해 허영과 자만을 불러들인다. 당연히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 처하게 될 뿐이다. 특히 오디세우스가 키클롭스의 동굴에서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를 대하는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처음에 외눈박이 괴물에게'우티스(Outis)'라고 소개하며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즉 자신을 '노바디(Nobody)'요 '아무것도 아닌 자'라고 안심시켜 놓고 키클롭스의 눈을 찌르고 마침내 동굴을 탈출한다. 하지만 그는 탈출 이후 자만한 나머지 자신의 정체인 '이타케에 사는 오디세우스(Somebody)'라고 밝힌다. 즉 그는 주소, 이름, 약력까지 자랑스럽게 떠벌리다가 수많은 위험에 처하며 목숨을 겨우 지켜낸다. 그나마 남은 항해 동안 '노바디'로 자신을 낮춘 덕분이었다. 우린 분명 이름 석자를 정확히 공개하며 정체성 있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렇지만 허영과 자만 가득한 '섬바디'는 삶의 복병이 될 것이다. 우린 매사에 토로이 전쟁에 임했던 오디세우스처럼 '아무것도 아닌 자'로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혹 사회가 부여한 지위나 명성 때문에 '노바디'라는 언어를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억하자. 삶의 신은 허영과 자만에 가득찬 '섬바디(Somebody)'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고 타자를 존중하는 '노바디(Nobody)'를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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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여! 호기심 덩어리를 존중하라.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개학 첫날을 맞이할까?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너무도 익숙한 그 벨소리를 또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지만 때론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개학 첫날을 맞이할까? 공부에 중압감이 있는 A군에게는 교문을 들어서는 발걸음이 무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철없이 놀기를 좋아하는 B군에게는 교실 문을 넘어서는 발걸음이 가벼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와 방학으로 인하여‘지식의 약발’이 많이 떨어졌으니 그들은 다시 익숙한 지식 익힘을 반복해야만 한다. 그래야, 미래의 꿈도 이룰 수 있겠지만 가깝게는 엄마, 아빠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기부터는 학생들에게‘지식의 효용성’만 안내하지 말자. 낯섦이 익숙함을 앞서는 세상에서 우린 또다시 아이들에게 익숙함의 극치인 지식만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부터 변해야 하고 교사부터 낯섦에 익숙해야 한다. 마치 부모가 아닌 고모나 이모에게서 익숙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은 호기심 덩어리다. 모든 것이 다 궁금한데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호기심이 급격히 줄어든다. 왜 그럴까? 모든 학생이 그곳에서 타율적인 의무를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익숙함만 넘쳐나고 낯섦은 자리를 감춘지가 오래다. 조회, 시간표, 청소, 수업, 타종소리, 점심, 자율학습, 심화학습, 종례 같은 해묵은 일상이 널려있을 뿐이다. 학생들은 교과서만 봐도 마음이 무겁다. 아니, 칠판에 또박또박 쓰여 있는 학습목표만 봐도 속이 울렁거린다. 칠판과 교과서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그러나 지금은 하고 싶지 않은 그일, 공부와 성적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냥 있자니 A군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고, B군의 노트에 글씨 쓰는 소리가 끝없이 들여오니 괜히 불안해진다.‘그러니 어서 책장을 넘겨야 하지 않겠니, 어서 노트에 필기를 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질책하는 것만 같다. 학생들에게 호기심을 돌려주자. 동안 익숙함에 빠져서 잃어버린 호기심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자. 혹여 교실이 여행지에서 잠깐 머무르는 호텔방이라면 어떨까? 깔끔하게 정돈된 순백의 시트에서 생각꾸러미를 하나 둘 꺼내어 새로운 생각을 조합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자. 익숙함의 흔적이 없는 자유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설렘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 여행지의 호텔방은 언제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이다. 처음 들어설 때도 그렇고 마지막 나올 때에도 그렇다. 그곳은 집요하리만큼 익숙함을 지우는 마력의 공간이요, 재생의 공간이다. 그러기에 그곳에서는 언제나 삶을 초기화할 수 있다. V군이 교실 문을 호텔 방처럼 들어선다. 선생님은 벨맨처럼 V군의 가방을 받아 들고 정중히 순결한 방으로 안내한다. 그러면 V군은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다. V군은 그곳에서 가방에 가득 들어있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꺼내는 것이다. 이처럼 학교는 학생들에게 익숙한 장소가 아니라 낯선 공간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곳이 자신을 알아주기고 하고 받아들여지기까지 하기에 마음은 평온할 것이다. 그곳에서 벨맨의 도움을 받으며 휴식을 취하다가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치며 생각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공부는 주변에 자리한 익숙함의 허깨비들과 싸우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에게 공부는 익숙함을 완벽한 익숙함으로 익히고 또 익히는 시간일 뿐이다. 혹여 A군과 B군과 V군이 확정적인 지식 익힘에서 벗어나 호텔방 같은 교실에서 다시 낯섦과 대화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앞으로 마주칠 삶의 블랙홀 속에서도 짜릿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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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롯 광풍(狂風)을 CT로 스캔해볼까?요즘 대한민국은 트롯 광풍(狂風)에 휩싸여 있다. 김다현, 전유진, 김태연, 송가인, 임영웅, 신승태, 신미래 등등 하루 종일 열거해도 못 다할 이름들에 많은 사람이 매료되어 있다. 트롯 전국체전이 코로나19로 아픔에 빠져 있는 국민을 잠시나마 위로해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맨얼굴 또한 만만치 않다. 트롯 광풍은 개인이 가진 능력을 마음껏 펼쳐 인정받으면 그에 따른 보상을 준다는 극히 능력주의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말 그럴싸하다. 여기서는 KBS2에서 기획했던 트롯 전국체전에 대해서만 맨얼굴을 스캔해보고자 한다. 혹 못 보신 분들을 위하여 잠깐 설명 드릴까 한다. 이 프로그램은 전국 팔도의 대표 가수에서 글로벌 K-트로트의 주역이 될 새 얼굴을 찾기 위한 KBS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무명 및 소질 있는 가수를 뽑아 전국 팔도로 나누어서 노래 전국체전을 연 새롭게 시도한 방송이었다. 심사위원들 또한 유명한 작곡가 및 가수 그리고 탤런트로 구성되어 있어서 타 방송사의 트롯 프로그램보다는 신뢰성이 높았다. 그러나 트롯 전국체전은 노래 잘하는 사람을 뽑는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50%의 시청자 의견을 점수를 반영하는 기획으로 인하여 인기 있는 사람들을 선정하는 황당무계한 결말을 보여주었다. 심사위원들이 본선에 진출한 8명의 가수 중에서 신승태가 노래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했지만 결국 그는 등위에도 들지 못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또한 예선에서 보이스 매력을 지닌 신미래는 마지막 부른 한 곡의 노래가 앞에 불렀던 노래에 비해 조금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탈락의 쓴잔을 맛 보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그녀 또한 심사위원들에게 재능이 출중한 가수라고 극찬을 받았지만, 담당 PD들이 시청자에게 불합리한 선택을 유도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여기서 신승태나 신미래를 감싸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이 프로그램의 허상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학교나 사회에서 밤낮으로 능력주의 및 일등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공정한 경쟁 끝의 승리가 미덕이기에 많은 사람이 더더욱 공정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심사위원들이 노래를 잘했다고 인정한 가수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에게 인지도가 높은 가수에게 상을 주는 상식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구를 위한 경연이었을까? 이 경연을 통해 시청률을 높여 광고 수익을 올리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무하게 마무리하는 경연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무명 가수들의 노래를 듣기 위하여 끝까지 이 프로그램을 시청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말 때문에 스트레스 지수가 많이 올라갔다.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 몇몇 방송사가 유명한 가수끼리 경연을 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불후의 명곡이나 복면가왕이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어떻게 소질과 장르가 다른 가수끼리 경쟁을 시켜 평가한단 말인가? 있지도 않은 1등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노력하는 방송사의 맨얼굴이 뜨겁기만 하다. 이런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시청자 또한 피해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 곳곳이 다른 사람을 이기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그런 모습을 버젓이 지켜보면서 즐기고만 있다. 이게 바로 능력이고 공정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니 승자들의 오만함과 패자들의 무능함이 마치 당연하고 정당한 것처럼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만든다. 아직도 일확천금을 꿈꾸고 있는가. 능력주의를 빙자하여 사람의 각기 다른 기능과 재능을 평가해 편을 가르는 것이 좋은 기획일까? 결국 한쪽만이 성과를 독점하게 하는 이런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이 마땅한지 묻고 싶다.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주는 경연 방송 프로그램은 이젠 그만했으면 좋겠다. 정말 수많은 탈락자에게 부의 상실감은 물론이요, 인간의 자존감마저 빼앗는 방송은 멈췄으면 좋겠다. 능력 제일주의가 정말 공정한 사회일까? 실력 제일주의가 진정 정의로운 사회일까? 앞으로도 다음 세대에게 그런 믿음을 심어 주고 싶은지 진중(眞重)하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