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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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는 자는 미움 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지난 10년 동안 세계 평화를 위해 일했던 전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씨는 임기를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들어와 이제는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한목숨 바쳐 열심히 일하겠으니 지지해 달라고 여기저기 다녔습니다. 그러더니 여론조사에서 기대만큼 지지율이 오르지 않고 오히려 떨어지면서 기존 정치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상황을 만나자, 한목숨 바쳐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던 각오는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직을 수락하며 조용히 한국을 떠났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알아줄 터인데, 일단 알아주고 자리를 주면 열심히 일하겠다고 부르댄 것입니다. 그러더니 급박한 상황에서는 백의종군이라도 하여 백성을 구한 이순신장군처럼 우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일하지는 않고, 자신을 알아주고 교수자리도 챙겨주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과연 반기문씨는 누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다고 한 것일까요? 반기문씨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럼 그는 진보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까요? 아니면 보수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까요? 혹은 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폈을까요? 아니면 사용자를 위한 정책을 폈을까요? 우리는 흔히 모든 사람을 두루 포용하는 사람을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시류에 아부하여 인기를 얻는 협잡꾼에 불과합니다. 지지율에 목매어 여기저기서 당신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에게 공자의 일갈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 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자로(子路)」 (제자) 자공이 여쭈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을 선생은 어떻게 보십니까?” 선생님 가라사대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럼 마을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사람을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못하다.” 마을의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는데 뭐가 부족하다는 것인지 공자의 말을 의아하게 여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가 이 장에 대하여 ‘마을 사람들 가운데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는데도 나쁜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구차하게 나쁜 사람들에게 부합하는 행동이 있을 것이고, 나쁜 사람들이 미워하는데도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좋다고 할 만한 내실이 없을 것이다.’라고 아주 멋진 설명을 붙였습니다. 정치는 한정된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입니다. 한정된 것을 모두에게 줄 수는 없으니, 모두에게 주겠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물론 새로운 재화를 개발하면 된다고 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면 옛 것은 사라집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과 태극기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모두 얻을 수는 없습니다. 또 그런 다툼을 멈추고 서로 상생하는 정치를 만들겠다고 말하는데, 누구의 것을 덜어 누구에게 주겠다는 것입니까? 선한 사람이 좋아하면 나쁜 사람은 반드시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미움 받을 용기 없이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명예와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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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보지 못 하면 다시 알려 주지 않는다.(좋은 스승은 불친절 한 안내자)중학생들은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과거 교양과 지성을 쌓기 위한 학문의 전당이었던 대학은 취업을 준비하는 학원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아서 취업을 하는데도, 기업체의 인사담당자들은 취업자들이 문제 해결 능력과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교육은 국가의 ‘百年之大計’라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교육은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수단입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해 시험에서는 좋은 성과를 얻지만 실제문제 해결 능력은 부족한 것이 한국 교육의 현실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배워야 할까요? 옆 사람이 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한다면 흔히 보는 옆 사람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공자는 자신을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평하였고, 또한 수많은 제자를 기른 훌륭한 교육자였습니다. 공자에게서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할지 들어보겠습니다. 子曰 “不憤 不啓, 不悱 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則 不復也.”「술이(述而)」 선생님 가라사대 “알고자 애태우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았고, 표현하고자 안타까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았다. 한 귀퉁이를 들어 보였는데 다른 세 귀퉁이로 대구하지 않으면 다시 알려주지 않았다.” 짧지만 교육 방법의 핵심을 잘 드러낸 구절입니다. 憤(분)은 답답해서 애태우는 모양이고, 悱(비)는 알고는 있지만 표현을 못해 안타까워하는 모양입니다. 啓(계)는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로 알고자 하는 것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고, 發(발)은 알 듯 말 듯 하여 정확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할 때, 핵심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핵심을 알려주더라도 낱낱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고는 거기서 유추해서 상응하는 다른 증거들을 들이대기 기다렸고, 만약 들이대지 못하면 더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자가 말한 배움의 핵심은 본인이 알고 싶어 애태우고, 정확히 알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알고 싶어 애태워야 선생님은 비로소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었고, 알 듯 말 듯 한 지경에 이르러야 비로소 정확한 지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알려주더라도 낱낱이 알려준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려주고는 다른 것을 유추하여 스스로 터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즉 공자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선생님은 매우 불친절한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은 너무나 친절한 안내자인 듯합니다. 행여 뒤쳐질세라 자기 생각을 한글로 채 표현도 하기 전에 영어를 가르치고, 중학교 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고등학교 과정을 앞당겨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안내자들이 한눈팔지 못하도록 손을 잡고 끌거나 업어서 사회생활의 출발점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그래서 막상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회에 나가서야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한국사회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배움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배움을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내자가 불친절할 때 길을 걷는 사람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갑니다. 배움을 강요하지 않을 때 스스로 미래를 설계하고 필요한 것을 배워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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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정치인과 유명한 정치인의 차이.개, 돼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헬조선의 노예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인으로 당당히 서고자 하는 염원에서, 손에는 촛불을 들고 찬바람 부는 겨울밤을 뜨겁게 달구던 국민들의 함성은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청문회를 열도록 하였고, 공범으로 지목된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청문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새누리당 소속 이완영, 이만희 국회의원은 일부 증인들과 모의하여 위증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를 방조했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이제 드러난 진실마저도 휘저어 흐리게 만들려고 합니다.청문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의원들 중에는 국민들의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저 이름이나 알리려고 나온 이들도 있는 듯합니다. 유명한 사람이 유명하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된다면,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은 이름을 알리기 위한 노력만을 할 것이고, 정작 훌륭한 정치를 하려는 노력은 안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서 국민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려 유명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유명해질 때 우리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지도자들을 감시 비판하고 질타할 때만이 헌법을 수호할 수 있습니다. 공자에게서 훌륭한 정치인과 유명한 정치인의 차이를 들어보겠습니다. 子張問 “士何如斯 可謂之達矣?” 子曰 “何哉, 爾所謂達者?” 子張對曰 “在邦必聞 在家必聞.” 子曰 “是聞也, 非達也. 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안연(顔淵)」 자장이 “선비는 어때야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선생님이 가라사대 “무엇이 네가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냐?” 자장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큰 도시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고, 작은 마을에서도 반드시 이름을 알려지는 것입니다.” 선생님 가라사대 “그것은 유명한 것일 뿐이지,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릇 훌륭하다는 것은 성품이 올곧고 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알아듣고 안색을 잘 살피며,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낮추는 것이니, 반드시 큰 도시에서도 현달할 것이고, 작은 마을에서도 현달할 것이다. 무릇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얼굴은 어질게 가꾸었지만 행동거지는 어진 것과는 거리가 멀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 도시에서도 소문이 날 것이고, 작은 마을에서도 소문이 날 것이다.” 어려운 문장입니다. ‘達’은 ‘현달하다’와 ‘통달하다’는 두 가지 뜻이 있고, ‘聞’은 ‘알려지다’와 ‘소문나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공자는 ‘達’과 ‘聞’이 갖는 두 가지 의미를 잘 살려, 선비의 길을 묻는 제자 자장을 가르칩니다. 자장은 어떻게 하면 현달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공자는 현달하고 싶은지, 통달하고 싶은지 되묻습니다. 자장은 통달은 생각도 못하고 널리 알려지는 것, 즉 현달만을 말합니다. 그랬더니 공자는 통달의 길을 알려주고, 통달하면 결국 현달하게 되지만, 현달만을 바라면 소문만 무성할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정치인의 훌륭함은 법을 잘 지키며(直) 정의로워야 하고, 말과 드러난 것을 잘 살펴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소문이 나는 방법은 외모는 인자한 듯한데, 실제 행동은 어진 것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어진 듯 부르대는 것입니다. 이제 주사로 만들어진 대통령의 인자한 얼굴과 세월호 속에서 잦아들던 애간장 끊는 외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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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신실함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최순실이 사용했던 태블릿컴퓨터의 파일을 분석하여 최순실이 국정에 간여하였다는 JTBC 뉴스 보도로 촉발된 ‘최순실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대통령은 두 차례 대국민담화를 하였습니다. 제1차 대국민담화에서는 최순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하며 사과를 하면서, 청와대 보좌진이 갖춰지기 전까지만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최순실의 태블릿컴퓨터와 검찰의 조사는 최근까지도 국가기밀과 국무회의 자료를 유출하고 국정에 간여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2차 대국민담화에서는 울먹이며 ‘미르재단’ 설립을 위해 대기업으로부터 모금한 것은 최순실이 개인적으로 한 것이고 대기업의 선의라고 하면서 자신은 검찰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조사를 통해 ‘미르재단’ 설립과 모금에 박근혜대통령이 깊이 관여하였다는 점을 밝히자, 박근혜대통령은 검찰 조사 요구에 불응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은 지난 한달 간 두 번씩이나 국민을 상대로 곧 들통 날 뻔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통령의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공자에게 들어보겠습니다.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위정(爲政)」 선생님 가라사대 “사람이 신실함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큰 수레에 멍에와 연결하는 빗장이 없고, 작은 수레에 멍에와 연결하는 빗장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써 수레를 움직이게 하겠는가?” ‘大車’는 짐을 나르는 소달구지를 의미하고, ‘小車’는 사람이 타던 마차를 의미합니다. 소달구지든 마차든 수레를 소나 말이 매는 멍에 연결하는 수레빗장이 있어야 소나 말에 끌려 수레가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수레빗장이 없다면 소나 말이 있어도 수레는 좀처럼 움직일 수 없습니다.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자동차의 외양은 번지르르한데 엔진룸에 엔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信’이란 말이 사실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사실에 부합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신뢰합니다.그런데 그 사람의 말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다면 공자는 그 사람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즉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한 거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데도 늘 믿어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부르댑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공자의 태도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수레빗장이 없는 수레와 같으니 어디다 쓸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엔진이 없는 차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차가 다시 달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그 차에 타서 시동을 걸며, 시동이 걸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폐차를 하시겠습니까? 거짓말은 직면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대통령은 어떤 것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신뢰는 거짓으로 순간을 모면하고 ‘믿어라’고 부르대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고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어라 말고 믿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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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와 겸양으로 다스려야.논어 칼럼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의 말을 빌자면 박근혜 대통령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비선실세’로 여겨지던 최순실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 ‘도 넘은 인신공격’이라고 두둔하던 박근혜대통령은 10월 25일 대통령연설문이 유출된 점을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강조하고는 여지없이 그 원인으로 북한의 핵개발과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지목하였습니다. 새누리당 대표인 이정현 의원은 9월 26일 김재수 농림축산부장관해임건의안을 강행처리한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종용하며 무려 7일간이나 단식농성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세운 명분이 “의회 민주주의의 복원”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헌법 1조가 유린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할 책임을 맡은 대통령 본인이 “순수한 마음”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청문회에서 ‘부적격’이라고 판단한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장관 임명을 강행한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한 국회의장의 사퇴를 종용하는 이정현 의원은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정신을 유린하고 국민의 뜻을 무시하며 ‘의회 민주주의’를 뭉개버렸습니다. 과연 대한민국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지 공자에게 들어보겠습니다. 子曰 “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何.” 「리인(里仁)」 선생님 가라사대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예를 어찌 하겠는가?” ‘예’와 ‘겸양’이라고 하니 말을 곱게 하고 행동을 공손하게 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와 ‘겸양’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학이(學而)」 선생님 가라사대 “말을 곱게 하고 순하게 구는 것이 인(仁)한 경우는 드물구나.” 공자는 「학이(學而)」편 구절처럼 말이 곱고 행동이 유순한 것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자는 10월 21일 대통령 비서실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박근혜대통령을 ‘마치 죄의식 없는 확신범 같은 상태’라고 비판한 노회찬 의원을 국회윤리위에 제소하려는 새누리당 의원들을 ‘교언영색’하는 무리라고 평했을 것입니다. ‘예’는 공자가 살던 시대의 헌법이었습니다. ‘겸양’은 자신의 권리와 생각을 주장하기 전에 ‘예’에 맞는지 살펴보는 자세입니다. ‘예’는 수많은 이해가 충돌할 때, 그 충돌을 조정하는 기준이고, ‘겸양’, 자기를 낮추는 것은 그 충돌을 조정하는 선결조건입니다. 즉 ‘예’의 근본정신은 ‘겸양’에 있습니다.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헌법정신에 근거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헌법정신에 근거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면 명분이 분명하니 국가의 위기는 오지도 않을 것이고 위기를 쉽게 극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통치자가 헌법정신을 저버린다면 ‘법과 질서’는 살인과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국가의 위기는 가중될 뿐입니다. 헌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헌법을 수호하려는 의지가 헌법을 헌법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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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야 왜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어떤 인물이냐고?요즘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은 건물주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공부에 몰두하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취직을 위한 공부에 몰두합니다.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공무원 되기를 가장 선호합니다. 그렇게 취직해서 돈을 벌더라도 집 한 채 마련하기 힘든 현실이니, 월세를 받을 수 있는 건물주가 되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꿈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즉 아이들은 어른을 보면서 세상을 배우니, 어른들의 바람 또한 건물주가 되고, 안정된 직장이나 직업을 갖는 것이겠죠. 하지만 건물주니 직장이니 직업이니 하는 것을 떠나서, 여러분은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은 부모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습니까? 자녀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평가하기를 바랍니까? 공자는 오갈 곳 없는 처지에서도 당당히 ‘나는 이런 사람이다’하고 말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곽재우는 호를 “망우(忘憂)”라고 지어 그런 공자를 흠모하여 닮고자 했습니다. 과연 공자는 자신을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겠습니다.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 云爾” 「술이(述而)」 초나라의 실력자인 섭공이 자로에게 스승인 공자에 관하여 물었는데, 자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해 듣고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로야! 너는 어째서 ‘우리 선생님은 사람됨이 마음을 내면 먹는 것도 잊고, 즐거우면 걱정도 잊어버려,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하지 않았느냐!” 공자는 56세에 고향인 노나라를 떠나 68세에 돌아올 때까지 벼슬자리를 구하며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돕니다. 초나라에 이른 것은 60대 초반 무렵입니다. 초나라는 남쪽의 큰 나라였고, 초나라의 임금인 소왕은 공자를 등용하려 했으나, 벼슬아치들이 반대하여 등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초나라의 대부면서 실권자인 섭공이 자로에게 스승인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묻습니다. 섭공이 공자를 모를 리 없으니 넌지시 공자가 직접 찾아오면 등용을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스승을 잘 아는 자존심 강하고 용감한 제자 자로는 대꾸도 않고 물러나와 공자에게 자초지종을 고합니다. 공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너는 용감하다고 하면서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물러났느냐고 타박하듯, 공자는 ‘나는 마음을 내면 밥 먹는 것도 잊고, 깨달아 얻는 것이 있어 즐거우면 세상살이 근심걱정을 잊는 사람이다. 내 비록 늙고 병든다고 이런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스스로 답합니다. 우리는 하기 쉬운 말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은 때론 밥 먹는 것을 잊어야 하고, 세상살이 근심걱정을 잊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공자가 아니니 밥도 먹어야 하고 세상살이 근심걱정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세끼 먹는 것과 쉴 곳을 찾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고, 소유로 평가받지 않지 않고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하고자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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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을 삼을 때 경계해야 할 것.사회적 관계 수준을 조사한 OECD 통계를 보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한국인의 72%만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낮은 수치라고 하니, ‘정이 많은 민족’이라는 평가는 지나간 옛말이 돼버린 듯합니다. 굳이 OECD 통계 자료가 아니더라도 높은 자살률이나 노인 1인 가구의 증가, 고독사의 증가 등은 한국 사회의 사회적 관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족은 혈연에 의한 형성된 관계지만, 친구는 수평적이며 능동적 사귐을 통해 형성된 관계입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자산으로 삶의 큰 보람이며 즐거움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늘 좋은 벗을 사귀라고 하지만, 곁에 함께 있는 친구를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과연 좋은 친구는 어떤 사람일지 공자에게 들어보겠습니다. 孔子曰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佞 損矣.” 「계씨(季氏)」 공선생님 가라사대 “나를 보태주는 벗이 세 종류 있고, 나를 깎아내리는 벗이 세 종류 있다. 곧은 사람을 벗하고, 참된 사람을 벗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을 벗하는 것은 보탬이 된다.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벗하고,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을 벗하고, 실없이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벗하는 것은 자신을 깎아내리게 된다.” 이 구절은 ‘子曰’로 시작하는 다른 장과는 달리 ‘孔子曰’로 시작하고 있고, 또한 이런 말을 한 배경도 드러나 있지 않은 걸 보면, 아마 공자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유행하는 말을 제자들이 공자의 말로 『논어』에 집어넣은 듯합니다. 이 구절이 공자가 직접 한 말이든 아니든,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친구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거울이 없으면 자신을 비쳐볼 수도 없고, 비쳐볼 수 없으니 어디가 흐트러졌고 어디를 다듬어야할지 알 수도 없습니다. 곧은 사람을 벗하면 자신의 허물을 들을 수 있고, 참된 사람을 벗하면 자기도 참될 수 있으며, 지식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밝아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곧은 사람(直)은 모났다고 하고, 참된 사람(諒)은 융통성 없다고 하며, 지식이 많은 사람(多聞)은 깐깐하다고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법과 제도를 잘 알지만 동료들이 싫어하는 것은 눈감아 주고(便辟), 면전에서는 수긍하며 듣기 좋은 말만 하고(善柔), 윤똑똑이 마냥 비판하기 좋아하지만 눈앞의 잘못은 넘기는(便佞) 사람을 좋은 동료로 여깁니다. ‘편벽’하고, ‘선유’하고 ‘편녕’하는 사람은 당장에 함께 일을 하기에는 좋은 동료일 수는 있지만, 오래 갈 수 있는 우정을 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는 직장에서 퇴직을 하기 시작하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 사이 연령대에서 사회적 관계 수준이 확 떨어집니다. 내부고발자는 곧은 사람인데도, 조직의 배신자라고 배척합니다. 절차를 따르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참된 사람인데도, 융통성이 없다고 눈을 흘깁니다. 동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바른 식견을 가진 사람인데도, 위아래도 없다고 왕따를 시킵니다. 한국 사회에서 좋은 벗들은 곤궁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의지할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는 외톨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좋은 벗들의 벗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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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에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서울시는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을 돕기 위해 최장 6개월간 매달 50만원씩 지원하는 청년수당정책을 수립하고, 지난 7월 최종 대상자 3000명을 선정하여 첫 달 활동지원금 50만원을 지급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지부에서 곧바로 지급을 취소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렸습니다. 복지부는 이 정책이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여 반대합니다. 복지부는 청년들의 복지를 위해 이런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할 정부 부처인데, 오히려 자신의 직무를 방기하고 또한 부정하고 있습니다. 복지부는 복지를 방해하는 일을 하고, 통일부는 통일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만든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국방부는 안보를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지만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 관계로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 명분이 바르지 않으니 말에 조리가 없어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하니 구차하게 힘으로 제압하려고 합니다. 공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려면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하고, 말에 조리를 세워 구차함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 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則 言不順, 言不順則 事不成, 事不成則 禮樂不興, 禮樂不興則 刑罰不中, 刑罰不中則 民無所措手足. 故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자로(子路)」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 정치를 하려한다면,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선생님 가라사대,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을 것이다.” 자로가 말했다, “역시나 그렇군요, 선생님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듯합니다! 하필 이름을 바로잡는다고 하십니까?” 선생님 가라사대, “야비하구나, 유 이녀석아! 군자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입 다물어야 하는 것을.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조리가 없고, 말에 조리가 없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타당하지 못하게 된다. 형벌이 타당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조차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은 조리를 세울 수 있어야 하고, 말에 조리가 있다면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군자는 말에 구차함이 없어야만 한다.” 자로는 고락을 함께 했던 용감하지만 다소 아둔한 공자와 비슷한 연배의 제자입니다. 이때는 공자의 정치적 유랑 끝 무렵으로 위나라의 어린 임금이 공자를 모시고 정치를 하려고 하던 상황입니다. 자로는 선생님께 드디어 등용될 기회를 얻었으니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지 묻습니다. 공자는 구체적 정책은 말씀하지 않고 명분을 바로 잡겠다고만 말합니다. 자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던 ‘니네 선생님은 구체적인 정책은 없고 그럴듯한 명분만 있는 사람이다’라는 평판을 공자에게 전합니다. 공자는 제자 유를 꾸짖고는 명분이 있어야 사람을 설득할 수 있고, 사람을 설득할 수 있어야 일을 함께 도모하여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명분이 없다면 말에 조리가 없고 변명을 하거나 힘으로 눌러야 하니 구차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결국 복지부도 서울시가 지원한 활동지원금을 청년들이 유흥비로 써서 ‘도덕적 해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구차한 변명이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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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가 경계해야 할 세가지.요즘 신문에 연예인들의 성폭행 사건이나 재벌가의 불화, 정치인들의 권력 투쟁이 자주 등장합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폭행과 관련된 사건에는 어린 학생이나 젊은 사람이 연루되는 경우가 많고, 권력 투쟁과 관련된 사건에는 장년층이 많습니다. 그리고 재벌가의 불화나 부자간의 불화는 재산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애욕과 권력욕, 물욕 모두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나이에 따라 정도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마침 『논어』에 이와 관련된 구절이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공자가 생리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한 것도 아닐 텐데, 혈기를 운운하며 나이에 따라 더 경계해야 할 욕심의 종류를 밝혀놓은 게 재미있습니다. 孔子曰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及其長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계씨(季氏)」 공선생님 가라사대 “군자에게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 젊었을 때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았으니 애욕을 경계해야 하고, 성인이 되면 혈기가 강성하니 다툼을 경계해야 하며, 노인이 되면 혈기가 쇠하였으니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 ‘혈기’는 신체에너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이나 청년들은 신체에너지가 안정되지 않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에 조금 관심을 가졌다가 금방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지요. 돈은 모으기보다 쓰기 바쁘고, 권력 다툼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아마 가장 쉽게 접하고 끌리는 관심 대상은 이성(異性)일 것입니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혈기는 관심 대상인 이성에게로 쉽게 흘러가서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인이 되면 혈기는 안정되고 강성해집니다. 혈기가 강해지면 자신을 양보하지 않고 이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 해보자하며 팔을 걷어 부치며, 경쟁을 하게 되고 뭐든 이기려합니다. 젊었을 때는 이성친구만 있으면 됐는데, 성인이 되면 남보다 좋은 차, 넓은 집, 좋은 물건을 가지려고 합니다. 단지 갖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남과 비교하여 더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등수에 더 목을 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남보다 돋보이기 위해 돈도 많이 쓰지요.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면 혈기가 약해집니다. 혈기가 약해지면 이제 남과 다툴 힘은 없고, 또 혈기가 자꾸 위축되니 거둬들이고 움켜쥐려고 합니다. 그래서 받고자 하는 마음, 물건에 욕심내는 마음이 많아서 자꾸 물건을 사들이고 쌓아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돈이 많은 경우는 잡 자녀들도 믿지 못하고 돈을 꽁꽁 움켜쥐어서 가족들이 불화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많이 가졌으니 많이 베풀면 좋을 텐데, 혈기가 쇠하였으니 불안해서 베풀지 못하는 것이겠죠. 혈기에 따라 욕심의 종류가 다르니 세대차가 생기나 봅니다. 물론 그런 세대차는 반복되겠죠. 사람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혈기가 만드는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욕망은 삶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계하지 않으면 욕망은 결국 삶을 잡아먹고 맙니다. P.S.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9시까지 여수시민협 사무실에서 논어강독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문의전화 : 010-4698-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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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가르쳐 준 이 ' 사람 살피는 방법'제가 동양철학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제게 관상도 보느냐고 묻고는 관상 좀 봐달라고 합니다. 뭐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겠죠. 꼭 관상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업무상 많은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나 세월이 주는 지혜를 얻은 노인들은 사람의 행동거지나 얼굴 표정을 보고 그 사람이 장차 어떻겠다고 짐작하여 말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행동거지나 표정에 드러나고 그 성품이 그 사람의 앞날을 만드는 것이니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공자는 『논어』「위정」편에서 ‘사람 살피는 방법(觀人法)’을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구절로 정리해서 알려줍니다.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위정(爲政)」 선생님 가라사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고, 그 일을 하는 동기를 살피고, 그 일을 편히 여기는지를 알아본다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이 구절은 한문의 매력이 묻어납니다. ‘그냥 보다’라는 의미의 ‘視(시)’, ‘더 자세히 보다’는 의미의 ‘觀(관)’, ‘더 꼼꼼히 살펴보다’는 의미의 ‘察(찰)’을 써서 점점 더 자세히 봐야 알게 된다는 점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쉽게 볼 수 있는 행동거지를 ‘以(이)’로, 행동거지 뒤에 숨어 있는 동기를 ‘由(유)’로, 그리고 행동거지나 동기의 내면에 자리 잡은 감정을 ‘安(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즉 행동거지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고, 그 동기는 자세히 봐야 알 수 있고, 과연 그런 행동을 마지못해 하는지 즐거워서 하는지는 꼼꼼히 살펴봐야 알 수 있다는 점을 한자의 단어만 바꾸어 써서 간결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을 두 번 써서 결코 숨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게 뜻을 나타내는 글자인 한자의 매력 아닐까요? 공자가 가르쳐준 이 ‘사람 살피는 방법’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적용하기에는 무척 어렵습니다. 당장에 보이는 행동거지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기는 그냥 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따지며 살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마지못한 것인지 우러나온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알아봐야 알 수 있습니다. 즉 동기나 마음 상태는 짧은 시간에 파악되는 것이 아니니 당장에 벌어지는 일뿐 아니라 과거 행적도 봐야 동기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의 행동거지를 봐야 마지못한 것인지 우러나온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의 민생행보나 구속을 앞둔 기업인들의 투자행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국민들은 짐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동기를 밝히고 그 행위가 가식인지를 밝히는 데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자가 알려준 ‘사람 살피는 방법’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복잡한 과정은 생략하고 얼굴이나 몸의 생김새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관상법에 관심을 갖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 살피는 방법’이 비록 ‘다른 사람’을 살피는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다른 사람입니다. 혹여 다른 사람은 잘 살피면서 자신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