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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 ‘[다음 소희]와 악의 평범성’

기사입력 2023.04.1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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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클 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광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악의 평범성 1> 전문/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넓은 운동장에 신참 훈련병들이 예쁜 토끼들과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교관들이 뛰어들어 칼로 토끼들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토끼들의 껍질을 벗겨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훈련병들에게 던졌다.

    어린 병사들이 내장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도록 명령했다.

    명령은 날마다 반복되었고 나중에는

    훈련병들 스스로 토끼들의 뱃속에 칼을 담가 노를 저었다.

    미군 병사들이 베트남전쟁 투입 전에 받은 이 담력훈련을

    토끼훈련’(rabbit lesson)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의 수많은 학살은 우연도 실수도 아니었다.

     

     

    --<토끼훈련> 전문/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악의 평범성이란 철학적 용어(한나 아렌트를 가리키며 언급하는)가 아니다. 잔인함도 아니다. ‘평범성이다. 인간의 평화로운 일상과 현재적 삶으로의 놀이터처럼 기능하고 있는 페이스북을 통해 노출되고 있는 오늘 이 시간의 정상적 평범성이다. 그러나 정상인가? 평범한가? 내 존재의 평범성과 악의 평범성은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

     

     

    우리는 다함께 다음 소희영화를 봤다. 그들에게 소희는 착한 딸, 책임감 강한 제자,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직업을 소개받고 열심히 근무하는 여고생이다.

     

     

    소희는 자존심 상하게 하는 고객을 달래고,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오는 고객들의 마음을 돌려 재계약하게 하는 콜센터 실습여고생이다.

     

     

    최고의 통화기록과 고급한 성취율에 올랐던 즈음, 고객들은 해지할 권리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소희는 해지를 받아준 순간 회사의 해충이 된다.

     

     

    소희에게 전화는 걸려오는 단순한 통화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만큼 보수를 높여주는 노동의 성취 도구이며 회사를 견인하는 탱크의 바퀴인 것이다.

     

     

    끝없는 전화... 끝없는 설득...끝없는 폭력적 대꾸를 통해 얻어지는 노동력 평가, 그러나 월말의 결산 결과는 그 행위의 대가가 아니라 거대 자본의 노략질에 다름 아니다.

     

     

    현대 자본은 더욱 견고하게 노동을 착취하고 입막음하고 그러므로 악하다.

     

     

    의 연대는 자본뿐만 아니라 소희를 그 현장에 보낸 학교 선생님, 학교 게시판을 가득 채운 취업률, 취업과 취업률과 학교의 미래 비젼과 상위 기관의 조종이 영화 화면을 숫자로 채운다.

     

     

    숫자의 평범성! 피타고라스의 현현들이 21세기의 숫자를 신으로 받든다. 그 숫자판 안에 갇힌 수많은 소희들... ...‘소희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달성하고자 하는 숫자(자본)속으로 매몰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평범성이 아니라고?

     

     

    소희를 던져버린 숫자! 거대한 빅데이터!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생명인가 숫자인가!

     

    #인간과 토끼가 죽어가고 있다. 역사의 토끼는 이미 충분히 죽었으나, 살아가고 있는 존재 핏빛 동백으로 떨어져가는 젊음, 악의 평범성 속에서 지금도 다음 소희들은 숨 막히다. 카나리아의 마지막 변명조차 들리지 않는 깊고 어둔 갱 속에서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숨죽인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시간만이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건들과 내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악의 평범성을 건드릴 수 있는 눈빛, 그것이야말로 시의 비범성이다. 시는 평범성과 비범성을 두루 어깨동무하며 은유와 상징의 한 획을 긋는 현재적 표현방식이다. 시여 악을 부수는 악으로 가자 시는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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