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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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편지의 설원, 몽골.그날도 오늘처럼 보름달이 떴다. 떠오르고 있었다. 나를 향해 처음 뜨는 달이었다. 첫보름달! 희디흰 설원 드넓은 평원에 쌓인 눈, 저 멀리 한 떼의 말이 신세계를 건너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은 도대체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니 곧바로 환성이 터져나왔다. 와~~~!!! 눈이다 눈이다 말이다 달이다 보름달이다~~!!! 진실한 말은 ‘문장’이 아니다. ‘한’ 마디다. 긴 말은 사족이 대부분이다. 할 수 있는 말에 진실이 담긴 게 아니라, 단말마처럼 깊은 내면으로부터 자기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야말로 진실이며 진심이다. 참았던 한 마디가 그날 설원으로부터 터져 나왔는데, 사람들은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라 한다. 소원이 있었던가? 소원은 열망이며 기대감이며 희망이다. 그건 절망 속에서, 권태 속에서, 일상의 무의미한 헛된 웃음들 속에서나 건져 올려야 할 안간힘인 것이다. 소원은 없다! 사랑도 없다! 미움도 절망도 헛된 웃음도 도무지 한통속으로 야릇한 허위일 것만 같다. 모든 것은 한 풍경 속에 깃들어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 뿐. 그리하여 나는 몽골의 첫날을 첫기쁨과 첫황홀의 빛나는 신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은 죽는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슴돌에 새기지 않더라도, 내 가슴에 새겨져 그대와의 뜨거운 사랑 타령으로 거듭 되새김질 될 것이다. 몽골의 소들이 눈 속에 코를 박고 뜯어대던 가시 달린 풀들과의 입맞춤처럼 목숨 붙어있는 뜨거운 호흡으로 들숨 날숨 거듭 시를 쓰며 낡지 않는 영원을 노래할 것이다. 모든 첫날은 위험하다. 아무 것도 몰라서 위험하다. 모든 첫경험은 위험하지 않다. 아무 것도 모르므로 위험하지 않다. 모른다는 건, 완전하다는 것 모른다는 건 순결하므로 완전하고 순수하므로 완전하다. 사랑을 모른다! 그것만이 첫하늘이므로 완전하다. 알았다, 아 그 모순의 무지! 나는 몰랐다. 몽골의 겨울, 영하 40도의 추위, 설원에서 풀을 뜯으며 일 년 열두 달 서서 사는 말들의 생애, 나는 몰랐다. 눈꽃들이 하나도 흩날리지 않고 녹지 않고 꼿꼿이 설원의 전체를 하얗게 순결하게 지키며 설명할 수 없는 의 완전성의 자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걸. 나는 몰랐다 차탕족들이 사는 마을로 가려면 길을 잃어버려 꼼짝없이 산속 눈밭에서 얼어죽을 수도 있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영하 40도의 깊은 골짜기에 졸졸졸 온천이 흐르며 얼음집 게르에 들어가 목욕할 수 있으리라는 걸. 나는 몰랐다 모든 첫경험들이 그렇게 알 수 없는 신비의 생을 살게도 한다는 것을.... 우연히 함께 가게 된 몽공의 열흘은 나에겐 억겁 인연으로부터 온, 첫시간이었다. 말한다 모두가.. “영하 40도? 난 못 가 아니 안 가!” 영하 40도인 땅에서도 사람은 뜨겁게 숨을 내뿜으며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가보고 어찌 알랴? 바보는 용감하다. 난 바보다! 시의 첫 발자국을 앎으로부터 시작하려 하지 말자. 공자는 말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몽골여행으로부터 나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첫날의 바보스러움으로부터 지혜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여행과 인문학의 길은 그야말로 한통속이다. 어떤 문장이건 첫 한 마디를 만나는 일로부터 모든 지식과 지혜의 도서관은 내 안에 길을 놓아주는 것이다. 한 권의 책과 만나는 일은 그러므로 한 개인의 역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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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카르페 디엠”.子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고(허물 고)” “내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탓하지 않겠다.” -『논어한글역주』 <팔일 제3-21> 부분 /김용옥/통나무 지나간 일을 하나의 교훈으로 새겨서 스스로의 인생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나무랄 바 없겠으나, 그것이 지나쳐 사사건건 추억에 붙잡혀 오늘 밀고 나아가야 할 에너지를 소진시킬 일은 아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죽어버린 한 때인 것이다. 아름답다고 하면 더없이 아름답고, 후회스럽다고 하면 더없이 비루하게 여겨질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사유의 샘물을 스스로 파서 떠먹는 행위에 있다. 그 샘물이 맑고 시원하려면, 고여있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그 어떤 물도 고여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썩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간에 기대감을 갖고 늘 새로운 생각의 샘물을 나누는 일은 아름답다. 내가 새로워지면 내 친구도 새롭고 탱탱한 관계로 거듭난다. 스스로의 생각을 맑게 헹굴 수 있을 때 주위가 맑아진다. 내가 맑은데, 내 샘물이 맑은데 누가 싫어할까. 생각의 맑고 탁함의 차이는 빈 잔이나 같은 시간들을 뜻 없이 뒤돌아보느냐, 지금 여기에 충실하느냐의 차이다. 또한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두려워한다면 (물론 아름답게 상상하고 희망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 삶의 색채는 늘 불투명하며 답답한 채로 앞날을 막아설 것이다. 안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논어의 가르침은 배우고 행하라는 것이 가장 핵심철학이다. 행위란, 단순히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알 수 없다면 할 수 없다. 알지 못하면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이 행동을, 행동이 습관을,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는 말은 너무도 흔히 회자되는 말이다. 책 한 구절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이다. 언어의 힘은 그것이 곧 행위를 추동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리하여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넓은 마당을 꿰어차고 좌충우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행위의 기준을 현재에 두고 현재가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발짝씩 나아가는 길(道)을 만들어갈 때, 삶은 햇살처럼 밝게 빛나며, 깊이로부터 맑아진 샘물을 맛볼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는 인간의 역사(언어)를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언어)를 기록하고 논리 속에서 관찰, 성찰하며 살아왔다. 과거로부터 기록되어 전해졌지만 재해석해야 하는 오늘로서의 역사며 철학이다. 역사를 과거에 존재했던 사실이라고 해석했던 학문적 정의가 수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모든 삶은 오늘로서의 삶이다. 논어를 빌어 말하지 않더라도 새로움과 설레임만큼, 지금 이 순간만큼, 정신을 아름답게 진실하게 수놓아주는 것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걷는 행위, 사는 행위가 길(道)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어제를 내일을 걸을 수 있을 것인가. 어제도 내일도 허방일 따름이다. 한 번도 그대는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대는 어제라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 줄기 새파란 천둥번개였다 거친 바위를 퉁탕거리는 계곡물이었다 지금도 온몸이 뜨거운 능소화로 피어나는 정오 물속에 한목숨 풀어헤쳐버리는 물푸레나무 난바다 펄떡거리는 상어 한 마리, 수평선에 젖 물리는 돌고래 푸른 영혼이었다 --졸시, <카르페 디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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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선물,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스페인의 천재적 첼리스트 빠블로 카잘스의 말이 감동적인 것은, 그의 구십 대 때의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말했다. “선생님은 전세계가 인정하는 최정상의 첼리스트입니다. 그리고 연세까지 아흔을 넘기셨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매일 세 시간씩 연습을 하시는 겁니까?”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서... ...” 혹자는 예술을 타고난 능력, 기질이라고 말한다. 음악가, 화가, 시인 소설가를 일컬을 때 특히 “난 안 돼, 타고난 재주가 없어”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정말 그럴까? 타고나지 않아서 못 하는 걸까? 노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못 하는 걸까? 해 보지 않은 사람은 타고난 재주가 없어서 못 한다고 하고, 끝까지 가본 사람은 ‘운’이 좋아서 지금 이 지점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운’이란 무엇일까. 작가 조정래는 말했다. “열정은 능력이다.” “가장 뛰어난 능력은 지치지 않는 열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문학강의를 종종할 기회가 있다. 그때마다 이야기한다. “어떤 예술이 좋고, 어떤 예술에 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재능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그 분야에 끌리고 하면 즐겁다는 점 이것은 예술적 재능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진리에 주목하라. 만성(晩成)이란 오래 걸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오래 노력해야만 한다는 의미도 있다. “크게 되려면 오래 노력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노력은 재능을 능가하는 힘이며 인간에게 신술(神術)을 가져다주는 마력을 발휘하며 유치하게 금언을 흉내내서 말하자면 성공의 어머니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또 한 해의 시작을 예비한다. 삶이란 끝과 동시에 시작점에 서게 되고, 시작하다보면 마무리 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삶의 처음도 끝도 한 발자국을 딛는 일상에 다름 아니다. 그 일상의 소중한 존재적 비상이라 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한 인연(사람이건, 업무건, 재능이건, 책이건)을 고마움으로 끌어안고 열정을 다해 사랑하는 일이다. 세모의 햇살을 흠뻑 사랑으로 끌어안으면 새해에도 흠뻑 고마워할 복스러운 시간들이 몰려오리라. 인문학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20여년, 책의 소중함에 작가의 노고에 가슴 깊이 고마움을 갖고 살아왔다. 작가의식은 우주적 총체이다. 그 총체성에서 흘려주는 에너지가 시대상, 교육의 영향, 인간관계, 성격과 성품에서 발아하여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는 걸 느낀다. 생애 전체에 걸쳐서 그가 인식하고 의식하고 느끼고 깨닫고 행동하는 인문적 사상 철학으로 집대성 된 것이 또한 나의 시이고 칼럼이 되었다. 지금 그리고 내일의 지적 에너지를 마시는 일, 한 권의 책 속 언어를 가슴 깊이 이해하며 사유하는 과정 속에서 모든 지혜는 삶의 밑거름이 된다. 생의 성공의 잣대를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에 둔다면, 끊임없는 독서, 끊임없는 글쓰기, 그러한 과정으로서의 ‘사색(學: 논어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하나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독자 제현과 함께 그런 지혜의, 인문학의 새해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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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완성의 처음과 끝, 중용의 세계.“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성誠은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요, 도道는 스스로 길지워 나가는 것이다.”-중용 25-1성과 도는 반드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나눌 수 없으며 심心과 리理의 개념으로 나누어 말 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우주의 그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나타낸 두 개념이다.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며 인간과 천지자연에 모두 적용된다. 성誠과 성成, 도道와 도(導)라는 동음이의어적인 쌍관의 묘미를 살린 명언이다.-『중용한글역주』/도올 김용옥/ 통나무중용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기원전 480년 경 출생하여 60~80세 정도 살았다는 설이 있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논어로 집약된 공자의 사상 중에서 좀더 우주론적이며 인간론적인 사상의 ‘합일체’로의 핵심적 언어를 구사하며 중용을 펼쳐 나아간다. 인간의 도는 하늘로부터(天命)이며(天命之謂性)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요청되는 것이 학學(교敎)임을 설파한다. (修道之謂敎) 중용의 언어 중 세 마디(세계관의 평균율)를 꼽으라면 지知-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와 인仁-힘써 행하는 것-과 용勇-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중용 20-10) 배우는 사람은 행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행하는 것에 성실한 사람은 진정한 행위의 길 위에서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스스로의 부족함이나 스스로의 과잉된 가치관이나 스스로의 지리멸렬함에 대해 직관할 수 있다. 그 과정이 도道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세 가지를 알면 과연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되며 진정한 중화(中和)의 세계를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知斯三者, 則知所以脩身,知所以脩身 ,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중용 20-11 “이 세 가지를 알면 과연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되면 타인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타인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되면 천하국가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몸을 닦는다는 수신의 세계를 가장 치밀하게 요구하는 것이 신독(愼獨)이다. 아무도 없는 그 어떤 곳에서도 가장 명철하게 가장 부끄러움이 없는 태도를 취하는 인(仁)의 경지를 일컬어 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태도야말로 치인(治人)이며 치세(治世)며 치국(治國)으로 나아가는 윤리도덕의 뿌리인 것이다. 한 정치가의 삶이 국가를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한 농부의 삶, 한 노동자의 삶, 한 교육자의 삶이야말로 그 국가의 저력이요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으며, 개인의 측면에서 발원되는 각각의 민주적 역량이 그 뿌리라고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가치관이야말로 엄중한 국가적 자산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까지도 의(義)로운 인(仁)한 사람의 태도! 그건 어떤 사람이라도 스스로의 내면적 질서의 성실함을 갈고 닦지 않으면 또다른 길,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흔들림 없는 조화로움을 이루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용은 더 구체적인 인간 삶의 인드라망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인(仁)은 무엇일까요? 인(仁)이라는 것은 발음 그대로 인(人)입니다. 사람의 근본바탕의 감정이지요. 인의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친근한 사람을 친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인과 짝을 지어 생각해야 할 것이 의(義)입니다. 의란 무엇일까요? 의는 발음 그대로 의(宜)입니다. 마땅함이지요. 의의 세계에 있어서는 현인(賢人)을 객관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까운 혈연을 친하게 함의 무등급성과 현인을 공적으로 존중함의 등급성, 이 양면성으로부터 예(禮)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중용한글역주』20-5/도올 김용옥/ 통나무 인간에게 있어서 혈연만큼 중요한 관계가 없음을 일컫는 중용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 혈연의 의미는 협소한 가족의 의미를 넘어서 ‘친한 사람’과의 관계를 말한다. 내 삶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에게 얼마나 헌신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어쨌던 중용에서는 친한 친구를 소중하게 공경하고 그 공동체의 체온을 덥히는 일에 앞장서는 삶을 더 이어가서, 마땅히 그러함으로 깊어지는 것을 의(義)라고 정리한다. 그 지점에서 현인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 현인(賢人)이야말로 개인적이며 개별적인 삶의 철학을 선지식으로 보여주는 모델일 것이 분명함을 역설한다. 그런 와중에서 우리는 예(禮)의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예의 세계야말로 경(敬)을 최선으로 위치시킨 인간 실현의 장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 오륜(五倫)의 내용물이 위치한다. 오륜을 달성한 사람, 그는 덕(德)을 몸소 행하는 사람이며 그를 일컬어 현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범인의 삶의 과정에서도 넉넉히 달성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사상이 중용이다. 그러므로 중용의 성(誠)은 현실과 이상, 실천이성과 순수이성을 고요히 융합시킨 전범이라 할 만하다. 현장성에서는 조금 부족함이 있겠으나, 공자와 석가, 예수의 삶, 실천적 덕목을 몸소 실현한 성인들은 누구에게나 설득력있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객관적 도덕윤리를 앞장서 실천하며 이끌어주는 현인들의 말씀의 기록문인 경전과 역사철학서, 인문학의 언어들을 시시때때로 맞이하고 솔선수범 실천하는 삶을 추구해간다면 삶의 질곡이며 불평등한, 부조화한 일상이 좀더 정성(精誠)된 모습으로 정리되지 않을까 싶다. 내면을 닦는 성실함은 자기 긍정을 낳는다. 자기 긍정과 행위의 일치를 통해 타인을 만나는 그 관계야말로 사랑이다. 사랑이 밑받침된 사회, 그곳에서 서로를 친구하고, 그 친구와의 연대를 통해 국가적 우주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상처입지 않고 아귀다툼에 휩쓸리지 않으며 거대함 아닌 신실한 우정의 인드라망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중용의 책장을 만지작거린다. 도올의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첨가한다. “성(誠)이란, 내부와 외부의 조건에 따라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자기조직적 생성이다.” 우리가 편안하게 따뜻한 아랫목에서 조목조목 갈파한 문장들을 음미하며 삶의 진정성과 창조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많은 책의 저자들에게 새삼 고개 숙이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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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핏덩이었던 간난아이 |‘나 죄없응께 괜찮을 거네’ 속으로.그들은 죽었다. 그러면서 핏덩어리 생명을 떨쳐두었다. 아내의 뱃속에서 아직 햇빛을 보지 못 한 자신의 피붙이를, 태어나 있었지만 아직은 이 세상을 평화롭게 날갯짓할 수 없는 상태, 너무도 어린 아이를 버려둔 채, 아니 버려둘 수밖에 없는 채, 떠났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침묵과 함구로 비틀려진 세상을 바라보며 구천을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목숨 그 많은 절명들! 그렇게 7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여수순천 10.19사건을 조망한 책들이 나오고 있다. 증언록을 시작으로 논문집, 소설집 등이다. 탄생도 죽음도 삶조차도 당신들이 손가락질한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야! 아무 죄 없이 죽었다고 했어! 그 어떤 죽음엔들 실오라기만한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잖아? 하물며 그게 ‘밥 해준 죄’의 대가라고 한다면 그 어이없음에 대하여 거창하게 정의에 가깝진 않더라도, 상식선에서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밥’이 없다고, ‘밥’좀 나눠주라고, 아니면 총을 들이대며 ‘밥’ 아니 주면 죽여! 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죄로 당신을 끌고 가서 총살시켰다면. 2살이었던 아이가 72살, 엄마 뱃속 아이가 70살, 25살 꽃다운 새댁은 90을 넘어선 지금까지 그 피묻은 역사는 암흑 속에서 냉가슴을 앓고 살아왔다. 빛도 그림자도 아닌 통째로 눈물 밖에는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 한 채 명목(暝目)아닌 비참의 역설로 견뎌왔다. 사랑은 갈가리 찢겨 쌀 한 톨 진실된 관계의 그물 하나 지키지 못한 채 상처는 더욱 곪아 터지고 배고프고 억울하여 자존감은 댕강 잘린 하늘 아래 고개를 떨구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삶은 이미 ‘사랑’ 아닌 저주요 열망 아닌 포기요 밝음 아닌 동굴의 비밀이요 말할 수 있는 입 아닌 닫친 어처구니였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쓴다. <프리모 레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것을 쓴다.”--『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16쪽/ 여순연구소*가 그들의 입을 열게 했다면 공치사일까. 『여순10.19증언록』을 기획하며 그들의 충혈된 눈을 비로소 바라보고, 그날의 피맺힌 총소리와 함께 숨어버린 그 많은 목숨들을 너무나 늦게 호명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건 가까스로 막힌 역사의 혈관을 뚫는 과정이었다. 여순의 역사 속에서 비명에 간 이름들을 밝혀내고 단 한 마디도 할 말을 하지 못 했던 민초들의 억울한 죽음과 고통에 대하여 한 마디 한 마디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어내려 가는 일은, 회상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뤄서는 안 될 우리의 사명이며 국가의 절대적인 책임과 의무인 것이다. 그 이후에 민주주의다. 그럼으로써 바로 세워질 역사이다. 그들은 말한다. 억울함에 대하여가 아닌, 죽음의 비극에 대하여가 아닌 현재적 삶의 문제를. 아직 밝혀지지 않고 아직 바로 세워지지 못 한 개인들의 한밤의 비명소리가 더 밝게 곧추 세워지기를 원한다. “명예”를 되찾는 일이 그들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일인 것이다. 하룻밤 사이 산목숨이 축 늘어진 죽음으로 떠밀려버린 그 운명 아닌 운명의 청천벽력을 이해하면서, “나 죄 없응께 괜찮을 거네” 했던 당신들에게 그날 그 사건은 죽을죄는 아니었다, 그건 ‘진정 억울한 사건이었다’라고 말해주는 일은 국가가 나서서 더 명료하게 실현해야 할 진상규명이다. 그 과정에서 화해 그리고 평화의 맨얼굴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정당한 보상과 배상을 실행하는 일 역시 오늘 우리가 국가가 할 일이다. 『여순10.19증언록 나 죄 없응께 괜찮을 거네』를 읽으면서 아직도 넘기지 못한 질긴 음식물 한 가닥이 목 언저리에 맴돌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제주의 4.3처럼, 광주의 5.18처럼, 아직도 진행 중인 한국현대사의 비극 국가폭력을 깊이 사죄하고 역사의 늪으로부터 여순 유족들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 주인공들은 죽어도 죽지 못한 어둠을 헤매고 있다. 죽음이란 모쪼록 무(無)이며 평안이거늘, 그들을 고요히 눈 감겨 이 역사의 왜곡된 치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또한 그 어린(아 지금은 늙어버린) 그들의 유족에게 심장 떨리는 억울함을 지체 없이 벗겨주어야 한다. 폭력집단이 아닌 평화의 보루로서의 국가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여순연구소: 10.19 여순사건을 역사의 진실에 근거하여 재조명하고 있는 국립순천대학교 부설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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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가 바로 서는 날.우리의 역사가 바로 서는 날, 그날은 통일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날이리라. 보름달 두둥실 떠오르고, 강강수월래 서로 서로 어깨를 감싸안은 날, 그날은 더 이상 참담한 가슴 쥐어뜯지 않을 미래가 열리고, 형제인 핏줄들 더 이상 피눈물 흘리지 않아도 되는 날! 언젠가는 만날 것을 믿으며 기다려온 70여년! 지금도 결코 허물어뜨리지 못한 휴전선, 이어지지 못 한 도라산 기찻길, 건너지 못 한 도보다리, 이어서 건너서...... 아직 만나지 못 한 겨레의 한을 풀어야 할 때 그 길은 환한 웃음으로 삶의 한(恨) 날려보내리라. 개성으로 금강산으로 평양으로......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한강에서 압록강까지......걸어서 손잡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노래 부르며 생명으로 나비의 날갯짓으로 사랑으로! “사랑을 생산하는 오월 장미, 난 그녀의 소비자, 바람이 불면 사랑은 생산되고 바 람이 미친 듯 불면 또한 사랑은 모조리 소비된다불면을 생산하는 시간,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소비자, 시계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 가 던져준 인생론은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처럼 소비된다가는 동아줄에 매달린 소문을 생산하는 TV, 끊임없는 오디션 광고에 주눅 든 청 춘들, 여름 해수욕장 너른 무대 위에서 자존심은 절망처럼 소비된다시장 수족관 속 유유히 헤엄치는 도미를 생산하는 파도, 날카로운 칼날로 쓰윽 목이 잘리면 심해의 전설은 애욕처럼 깡그리 소비된다, 소주 한 잔이 또 한 잔 끊임없이 비만을 부추기며 소비된다문제는 '나'라는 생산품, '너'라는 생산품, 장롱이라는 생산품, 국가라는 생산품, 역사라는 생산품, 음모라는 생산품, 4월도 5월도 10월도, UN도 휴전선도 되 돌 이표처럼 생산된다 그 무한수열의 생산은 생산인가 허무맹랑함인가 내 기다림도 네 열정도 평화로 유토피아로 소비되지 못 한다면 그게 뭔가빛은 결론의 생산자, 결론은 과정의 생산자, 과정은 처음의 생산자, 암컷은 수컷 의 생산자 수컷은 욕망의 생산자, 생(生)은 고구마 뿌리의 생산자, 붉은 흙이 굵 은 팔뚝을 생산하며 한 아이를 낳았다 오늘이 태어났다 희망이다, 남과 북의 희 망이다 그렇게 생산하는 도보다리의 희망도 소비의 씨앗이 될 수 있다면,” -졸시, <소비자> 전문/ 2019 통일시집, [통일은 사랑입니다]수록 “사람과사랑과강과바다와물과띠와물레와실과바늘과사과와배와어깨와띠와어깨동무 와하늘과땅과고구마줄기와호박과들쭉술과띠와검은머리물새떼와두물머리와남한강 과북한강과갈대와부들과띠와대동여지도와호랑이와백두산천지와한라산백록담과곰 과하늘매발톱과흰그늘용담과띠와금강산과지리산과일만이천봉과노고단마고할미와 비로봉과영랑봉과띠와그대와나와우리모두와시와평화와자비와띠와빛과청춘과슬픔 과바람과나뭇잎과꽃잎과띠와추억과우주와지금인띠와그냥이라는띠와실꾸리풀듯풀 어버릴띠와꿈, 노래와춤과띠와!“ -졸시, <띠> 전문 /2019 통일시집, [통일은 사랑입니다]/메아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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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문제해결이다.우리에게 요즘의 화두는 단연 일본과의 무역마찰이 아닐까 싶다. 일본의 침략과 전쟁, 강제와 인권 유린 등으로 우리 민족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 당해왔다. 그런 와중에 6.25를 겪고 남북이 분단되어 작금에 이르기까지 혈연은 단절되고, 그 질곡의 역사를 아직 바른 관점과 바른 위치에 되돌려 놓지 못 한 채 고통 받고 있다. 그 고통의 시작과 과정 속에서 일본은 진실로 사과하지 않았다. 물론 그 국민의 다수가 과거 역사의 오류와 문제점을 시인하고 개인적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 국민에게 사과했으며 일본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고 양국 간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돌려놓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둡고 긴 터널의 연속이다. 어떻게 이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대치를 풀 수 있을까.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의 입장만 생각한다면 결코 지혜로운 해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더 미래지향적인 안목의 정치적 지도력이 절실하다. 인문학은 그 지혜를 이렇게 가르친다. <논어 학이편>/ 『논어한글역주』/도올 김용옥 정치란 무릇, 가장 본질적인 예와 겸양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나라 안의 국민적 안위와 행복의 문제는 물론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결단과 철학이 전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국제 관계는 더 말해 무엇하랴. 국제 질서가 있고, 나라와 나라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가 있다. 정치의 문제를 갑작스러운 무역 절차 차단이나 질서의 교란으로 몰고 가는 정치가는 지혜로운 지도자가 아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기간에 저질러온 만행에 대한 사과와 보상은 너무도 당연한 우리의 요구이며 일본의 의무이다. 그 와중에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여 나름대로의 선택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와 겸양의 수준 높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대한민국이 되길 소망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예와 겸양을 깊이 내면화시켜온 전통을 키워왔다. 말할 것도 없이 건국이념도 ‘홍익인간’이다. 국가와 국가 간의 침략이나 전쟁을 일삼은 그런 민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일본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우리와의 이 대치가 어떤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짐작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한 권력 지향적 오판을 하루빨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일파만파 무역을 통한 질서의 교란이 예상되는 한 앞으로 드러날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예(禮)란, 그러한 관계를 예상하고 세워놓은 아름다운 가치가 아닐까? 겸양이란 그러한 관계를 더 신실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미래가 중요하다. 이미 일어난 사태에 대한 수습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른 좀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지녀온 태도, 도전과 응전의 문제해결, 더 지혜로운 군자적(君子的) 해법을 통해 일본의 오만에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풀릴 수밖에 없는 그 시점까지 온국민의 지혜를 모아 이 난국을 돌파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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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중용中庸의 세계.致中和 치중화, 天地位焉 천지위언, 萬物育焉 만물육언.” “중中과 화和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천天과 지地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萬物이 잘 자라나게 된다.” -중용 1-5/『중용한글역주』/김용옥/통나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 안에 위치한 인간의 삶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이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한 생명체이며 그 근원의 주어짐과 삶의 방식은 치우침 없는 중中과 화和의 세계에 있음을 직시하라는 가르침이 중용의 핵심 사상이다. 지극하게 밀고 나아가기! 만물의 생명성을 꽃피우는 순간까지. 그 끄트머리가 어디인지 알 필요가 없다. 가고 또 가는 일만이 만물의 열매를 맺게 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실험되는 세계, 중용의 세계일 뿐이다. 중용의 반대, 치우침이란 아픔이다. 여기(아름다움)에 있어야 하는데 저기(오류)로 가고 있는 건 한 생명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다. 물과 불이 있어야 할 곳을 가로질러 지나치게 되면 화마가 되고 홍수가 되는 것처럼. 그러나 그 천지만물이 치우치게 되는 과정을 보면 인간살이의 모순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산을 깎아 욕심 가득한 건물을 짓기 위해서 낭떠러지가 생겨난 자리가 위험하다. 담뱃불을 아무 데나 비벼 끈 자리에 산불이 나고 인명피해로 이어진다. 그 안의 동물들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또한 치우침이란 맹목이다. 나와 너, 우리가 아니라 끝없는 이기적인 선택이 바로 공동체의 안녕을 해친다. 작은 공동체는 작은 대로, 국가는 국가 대로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며 문화적인 많은 것들을 거대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독차지하려 한다. 한 국가의 힘을 무소불위로 휘두르고 작은 국가는 지배당하거나 소외당한다. 빈익빈 부익부의 세계에서 끝없는 가난의 대물림이 더 많은 생명들을 위협한다. 평등세상을 구현하는 성인들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골짜기는 깊기만 하다. 그러므로 무엇이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 인문학이며 중용의 공부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안에 우리 모두의 안녕과 행복이 있다. “天命之謂性 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 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 수도지위교” “천天이 명命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교敎라고 한다.” -중용 1-1/『중용한글역주』/김용옥/통나무/ 중용의 첫 마디다. 우리의 삶에서 이미 성현의 한 마디가 아니더라도 내면적 성찰에 다가서면 시시때때로 느낄 수 있는 말이다. 생명의 거대 창조적 원천인 천天과 그것으로부터 한 인간에게 주어진 性은 결코 주어짐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도道의 과정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이루고자 한 지성의 펼침막을 교敎에 둔 점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무엇을 우위에 두건 앞과 뒤 옆과 옆이 평등하게 가득 둘러쳐진 세계가 중용의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이 먼저가 아니다. 또한 인간 생명이 그 중심도 아니다. 인간으로 와서 지금도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는 이 시공간의 융합이 道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걸음걸음이 어찌 스스럼없는 조건 없는 가벼움이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추기고 서로를 부추겨서 얻을 수 있는 배움(敎)의 세계로써 비로소 인간다움의 참다운 길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빛나는 것이 빛나기 위해서는 그 빛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를 함께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오른쪽이 오른쪽다우려면 왼쪽의 서로 다른 가치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 행복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불행이라는 또다른 어둠을 통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1등은 꼴찌에 의해서 빛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은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발전하고 뒤집히고 반전의 승리도 마다하지 않는 땀방울의 축제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난장이 되어야 한다. 중용은 그리하여 인간이 인간을, 생명이 생명을, 바람이 불을, 물과 흐름이 함께 공존하는 거대 우주의 항상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착되지 않고 고리타분하게 한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면서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우주의 원리를 부정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 안에 희로애락비喜怒哀樂悲의 기氣야말로 성性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외적이면서 내적인 삶,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의 조화로움을 이해하는 것이 좀더 평화적이며 선하며 진실하며 아름다운 삶의 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 그것만이 살아내는 과정의 지혜이므로. 짧은 문장 안에 그 모든 깊이의 중용을 설명하기가 버겁다. 그러나 이것만은 이해하기로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性(인간의 정리情理와 지혜의 원천) 이라는 명제는 바로 배움과 함께 완성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중용의 세계는 인문학의 깊이와 같은 맥락을 타고 온다. 오늘 여기에서 주어진 책 한 권, 수없는 문장의 넓이와 깊이가 오롯이 새겨진 대폭적인 언어의 조합으로부터 우리는 삶의 큰 흐름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놓지 못 하는 책 한 권, 『중용한글역주』를 들여다보는 일,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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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교육의 핵심적 역량을 키운다.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그건 단연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나 국가적 질서, 그 안에서 개인의 삶이 유지 발전된다고 할 때 교육은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건 인간의 태어남과 자람의 과정을 지켜볼 때 명확히 짐작할 수 있다. 혼자 먹이를 발견한다거나 홀로 육체적 성장을 이룰 수 없는 어린 아이 시절부터 인간은 혼자 정신을 발아시킨다거나 홀로 정신적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 인류의 스승이라고 할 많은 성현들은 교육의 문제를 통해 스스로의 인문학적 경지를 키워올리면서 화두로 삼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종교의 창시 역시 교육의 핵심 주제를 통해 제자들에게 인생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지금까지 그 사랑의 총체적 물음과 답변들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부처, 그 이전에 성립된 고대의 신화적 물음 등도 인간 삶의 방법적 화두들이다. 성현들은 물었고 또 답했다. 그 물음들의 중심은 ‘교육’이라는 학문으로 연구되고 발전되었다. 문학과 철학을 결합시켜 최고의 작품을 마무리했던 헤르만 헤세는 그의 명저 ‘유리알 유희’에서도 그 핵심 주제를 ‘교육’에 두었다. 그는 천재적 인물을 키워가는 명제를 다루면서 좀더 창조적인 방법을 고민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유희하듯이 나날의 삶을 키워가는 방법이면서 자유로운 영혼이 완성되게 하는 그것 ‘유리알 유희’라는 상징어를 통한 해탈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헤세를 탐독하면서 그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썼다. 그 내면의 대화를 소개한다. “'유리알 유희'의 기운이 아직 나의 온몸을 흔들어댑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마법이지요. 그대의 언어들은 처음엔 조금은 답답하고 지루했지요. 유리알 유희와 음악의 유희와 수학의 유희들을 통한 카스탈리안(명인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 있는 곳)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를 전방위적으로 살피면서 그의 의식이 점차 세련된, 정갈한 영혼의 유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세밀화 기법처럼 그려내고 있었어요. 교육기관과 교육의 방식이 한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거의 완전성에 가까운 인격체는 어떤 철학적 목표 설정을 통해 도야되어 가는가. 세상은 좀 더 난폭하고 좀 더 비열하고 좀 더 형식적인데 반해 ‘발트첼’(유희 명인들의 교육 기관, '무릇 발트첼에서는 유리알 유희자라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낳는다'라는 속담까지 전해지는.....)에서는 그보다 더 창조적이며 내면적이고 직관에 이르는 인간정신을 발아시키기 위해 어떤 스승의 면면을 활용하고 있는가. 그곳의 교육형태의 중심은 스승과의 만남인데, 그 만남을 통해 한 어린 영혼의 존재에 대한 긴밀한 대화 및 삶의 결을 느끼게 해 주는 것만이 참된 교육적 비전임을 웅변하고 있는 듯했지요. 헤세, 그대 자신은 정작 받아보지 못했던 교육의 '제도적 융합적 하모니'를 발트첼이라는 혁혁한 공간을 창조적으로 운영하게 함으로써 보여주고자 한 그 고뇌를 짐작하고도 남았음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스스로, 한 정지된 공간에서, 한 핏줄의 특징을 통한 직선적 교육으로는 결코 사회통합적 삶을 수행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고민을 풀어가려 한 건 아니었나 싶거든요. 어떤 인간이든, 타인을 보듬어 따사로운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하며, 타인으로부터 받은 너그러운 눈빛의 수혜를 일평생 간직함이 그러한 삶의 방법으로 또한 미래에 만날 어린 인격들을 받아들일만한 폭넓은 사랑의 방식으로 구현되어질 터이므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라고 할 뭉치적 사태만이 우리가 진실하게 이해하고 사유할 '삶'이며 '인간'이라고 저는 생각해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이 제아무리 잘 살았다 해도 어찌 '독야청청' '무소의 뿔처럼 혼자' 살았다고 할까요. '유아독존'이란 차라리, 이 우주의 한 생명이 처한 '고독'이야말로 '너' 아닌 것이 없고, '우리'아닌 삶은 가능치 않다는 것의 처절한 역설이 아닐지요. 그대가 펼쳐 보인 모든 소설의 중심에서 저는 오늘까지도 그 물음을 읽었답니다. 그러므로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온몸, 한 몸으로써 여러 몸을 수혈 받은 삶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몸의 뼈인 정신은 어떤 우주의 법칙을 끌어안고 끝없이 열려, 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온 비의를 어루만져야 할 것이며 나아가 또 다른 생명을 창조적인 인간으로 뒷바라지 하기위해 애쓸 것인가? 그 물음의 총체적 답변이 바로 '유리알 유희'였으니 그 개념은 애시당초 하나의 정직한 개념어로는 제시될 수 없는 철학적 상징이었다고 보여지네요. 함께 책 읽은 우리는 각자 그것이 갖는 개념과 스스로에게 비추어진 햇살과 같은 영롱함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보기도 했지요. '융합적 교육론' '수학이라는 논리가 음악이라는 영적 선율을 만나 펼쳐지는 통합적 학문예술의 상징어' '철학적 이론만이 아니라, 그것을 외적 사회적 삶과 결합시켜가는 내면의 단단한 인격이론' ... ...” 배움과 가르침, 사랑을 통해 인간성의 가치를 기르는 일이 교육이다. 그 어떤 교육적 제도나 정치적 목표를 떠나 그 중심에는 누군가에게 배웠으므로 그 배움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그것을 통해 또다른 가르침으로 연결되는 과정의 소중함을 구현하는 일, 그것이 인문학적 삶의 뼈대이다. 오늘 나는 읽는다, 배운다, 그리고 그 배움을 실천하려 애쓴다, 그 하나의 방법은 나눔이다. 가르치며 나누는 일을 고민한다면 인문학적인 일상의 한 축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잘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끈질기게 읽고 다지고 연구하며 쓰고 행동해야 하는가?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말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능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이 통합에 이르러야 완전해진다. 완전한 인간이란, 자신의 전 감각과 정신적 능력과 지적 장비로 무장한 사람을 말한다.” 그의 말 속 지적 장비란 다름 아닌 교육을 통해서 연마된 인문학적 소양을 말한다 할 수 있다. 교육이라는 언어 속에서 우리는 몸과 마음의 종합, 언어와 인생 법칙의 종합, 그 시간과 공간의 끊임없는 교감을 배양하는 여러 영혼들의 우정의 교류를 엿볼 수 있다. 그 안에 책이 있다! 인간 지혜의 범주 속에는 인문학적이며 교육적인 도구 언어와 그 집적체 책이 존재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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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철학자가 던진 아름다움과 인간에 대하여.인문학이란, 삶의 평가를 위한 하루하루의 지식과 지혜의 축적 과정이다. 평가만큼 어려운 게 없다. 더구나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공정한 평정을 담보하려면, 오랜 정신의 평안과 가치관의 균형점, 통합적이며 합리적 사유의 질서를 내면에 축적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사랑과 미움, 상처와 애증의 삶을 살게 되는 게 삶이다. 더욱 국가의 폭력이랄지 세계 속의 부조리한 전쟁 등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 전방위적인 경험적 다채로움, 그 경이로운 차이의 미학이 삶의 고갱이라고 생각한다.우리 스스로가 굳이 성인이나 현자적 일생에 기대어 삶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과학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여전히 인류 초기 역사의 경험을 통한, 고유한 종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들을 녹여내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연적 사실일 법도 하다. 종교는 그 나름의 교리적 모순이나 변천과정 속에서 결합된 문화적 축적물로써의 변형태가 대부분인 경우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더 많은 인류애는 종교가 담당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안의 사랑과 자비, 현세를 구원할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는 내세관이 종교의 본령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니체를 즐겨 읽는다. 그의 포효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한 세기 들어서 그는 지난 세기의 크나큰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섰는가.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외쳤던 차라투스트라가..... 그 놀라운 선언적 사유를 앞서 그의 문체를 통해 실존의 근본 문제에 천착해 보는 것도 이 5월의 진입로에 세울 신호등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니체를 읽다 보면, 위선에 눈뜬다. 위악의 말에 길든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삶의 모순됨을 정면으로 바라볼 줄 알게 된다. 그가 깨트리고 싶었던 모순이야말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역사 속의 권력적 힘, 그리고 그 부조리함에 굴복하며 극복하지못한 허약한 민중의 비겁이었다. 그 시대를 관통하고자 그는 치열함 아니면 내뱉을 수 없는 언어만으로 모든 시대적, 독일적 도덕과 학문과, 교육적 비철학(非哲學)들을 들쑤셔 놓았다. 많은 독자들이 그러한 통렬한 망치에 얻어맞고 나면 불편함 속을 헤맨다. 그 감정 때문에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 철학적 한 마디 '힘!' ‘권력- 위버멘쉬’ 그것을 잃는다. 자신을 해체하지 않으면 직시할 수 없는 그 지점, 불편을 껴안기 어려운 탓이다. 니체를 대하면서 그 불편한 비판을 통해, 부처가 설파했던 연민과 자비를 동시에 그려내어 스스로를 먼저 용서하기도 한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한다. 그러나....그가, 그와 나를 외면하고 저 비판적 언어를 비껴서 버린다면 그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우리의 내면은 스스로밖에 알 수 없는 심연에 가라앉아 있다. 자못 아름다운 비밀이다. 또한 추한 페르소나, 그 두터움을 깨트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벽일 수도 있다. 망치를 가진 철학자, 니체의 어법은 그러므로 아프다. 비굴한 도망자인 우리의 뒷덜미를 붙들고 더 솔직하게 정직하게 더 이상 비참, 굴종으로 가는 삶의 방식에 유혹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삶에서 유혹은 꼭 외부적이지만은 않다. 어쩌면 우리의 자의식은 그 언저리를 돌며 스스로 빠져들기를 바라고 있다는!유혹이란, 주체와 그 주체를 방해하는 기제에 의해 혼돈으로 가기에 유혹적이다. 질서의 명백함을 눈가림하므로 낭만적이다. 사실은 부정당하고, 스스로 곧게 말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진다. 그에 따른 말도 오리무중, 가식과 한몸이 된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그대도 다시 한 번 훑어봐야 한다. 그게 진실에 대한 예의다. 옷을 바꿔 입고, 눈썹을 붙이고, 립스틱을 빨갛게 칠하듯 뒤돌아보아도, 금세 지울 수는 없는 정신(자신에게마저 가리려고 하지 말라)의 더께를 비판하는 철학자 그가 니체다. 어제의 오늘이며 오늘의 내일이다. 그 연속적 사태가 삶의 꽃이다. 꽃이 피었다 지고 진자리에 꽃이 피듯 아름다울 수 있을까? 향기로운 연꽃처럼 진창을 피워 올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니체를 만나는 새벽이면 한 차례씩 묻는다. 물을 수 있기에 좋다. 그래서 두고두고 그를 만난다. 그 자리에 옴싹옴싹 피어나는 저 5월 지리산 바래봉의 산철쭉처럼 내 정신의 모순도 한 번쯤 활짝 피어나기를... 올해엔 이미 피었다 졌지만 또 만나면 내 온몸 황홀에 빠지게 할 영취산 진달래, 조계산 선암매처럼 그런 해후를 꿈꾼다. 가장 고귀한 종류의 아름다움은 갑자기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움이나, 폭풍처럼 도취시키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것은 역겨움을 일으키기 쉽다. 인간이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꿈속에서 한 번 만난 듯 우리들 마음속에 겸손히 자리 잡은 후 결국 우리를 점령하여 우리의 눈을 눈물로, 우리의 마음을 동경으로 채우면서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이다. ㅡ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무엇을 동경하게 되는가? 아름다움에는 틀림없이 많은 행복이 결부되어 있으리라고 우리는 공상한다.ㅡ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프리드리히 니체 /책세상 ; 책표지를 덮으면서;